여적/ 재고품 대학생
“거참 큰일들 났어. 저렇게 좋은 청년들이 일거리가 없어서 저렇게들 애를 쓰니.” 채만식의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식민지 시대의 고등 룸펜(실업자)인 P가 취직을 부탁하자, 신문사 사장은 이렇듯 상투적인 말로 위로한다. 고학력 청년 실업의 좌절을 뼈저리게 겪은 P는 열네 살짜리 아들을 학교 대신 인쇄소에 견습공으로 보낸다. “내가 학교 공부를 해봤는데 그게 아무 쓸모가 없어.” 여기서 ‘레디메이드(기성품) 인생’이란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꾸려 나갈 수 없는, 하나의 ‘물건’과 같은 존재라는 자조적 태도에서 나온 말이다.
요즘 한국사회는 채만식이 살았던 80년 전과 다를 게 없는 듯하다. 젊은이들의 취업이 어렵다 보니 연애·결혼·출산·인간관계·집장만·희망·꿈을 포기하는 ‘칠포세대’란 신조어까지 나왔다. 정부에서 내놓는 실업 대책도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신문사 사장이 ‘구직꾼 격퇴 수단으로 자룡이 헌 창 쓰듯’ 써온 ‘귀농’ ‘창업’ 같은 것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대학 또한 취업의 전진 기지가 된 지 오래다. 특히 인문계 졸업생 90%가 논다고 해서 나온 유행어가 ‘인구론’이다. 정부의 대학 구조개혁안도 사실상 취업률이 낮은 인문계열의 정원 축소와 통폐합이 핵심이다. 교육부 장관조차 “인문학보다는 취업이 우선”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세상이다.
이번에는 서울의 한 유명대학 총장이 학교를 ‘공장’에, 학생을 ‘재고물품’에 비유해 학생들이 들끓고 있다고 한다. 총장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했는데 재고만 쌓이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면 되겠느냐. 취업률 같은 사회적 요구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패러디 사진전을 여는 등 총장을 성토하고 있다. 공장에서 물품을 확인하는 직원의 사진에 ‘교수님이 출석을 체크하고 있다’라는 설명을 붙이는 식이다.
물론 학생들의 취업난에 대한 걱정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미래의 인재를 키우는 한 대학의 수장이 학교를 고작 ‘회사에 납품할 학생을 생산하는 공장’에 비유하는 건 어처구니 없다. 교육에 대한 근본 철학도 없이 대학을 오직 취업을 위해 학점을 쌓는 취업공장, ‘주식회사 유니버시티’로 만들겠다는 천박한 인식이 개탄스럽다. 200년 전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학교가 학교다우려면 참스승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김석종 논설위원 2015.4.3
'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향수 (0) | 2015.06.02 |
---|---|
소나무 시인 (0) | 2015.06.02 |
여적/ 검색의 시대 (0) | 2015.03.30 |
여적/ 어린이 놀이헌장 (0) | 2015.03.30 |
여적/ 행복감 (0) | 2015.03.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