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세월호, 십자가의 길
이스라엘 예루살렘 올드 시티 안에 ‘십자가의 길’이 있다. 라틴어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슬픔의 길’ ‘고난의 길’이라는 뜻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간 길이다. 예수는 로마 군사들이 휘두르는 채찍에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십자가를 지고 이 길을 걸어갔다. 군중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가시관을 씌우며 조롱했다. 예수 생애 마지막을 그린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그 장면이 생생하게 나온다.
예수살렘 십자가의 길은 모두 14처(處)로 재현돼 있다. 십자가의 길에는 빌라도 법정, 로마 군사들이 희롱한 곳, 예수가 처음 쓰러진 곳, 성모 마리아를 만난 곳, 십자가에 못박혀 처참하게 숨진 곳 등 14처마다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매주 금요일 프란치스코수도회가 이곳에서 십자가 수난을 기리는 의식을 거행한다.
중죄인을 못박아 죽이던 십자가는 예수 처형 후 그리스도교의 상징이자 예배의 대상이 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의 제단, 또는 죽음과 지옥에 대한 승리의 징표로 승화돼 전 세계로 전해졌다.
이땅에서는 1956년 경주 불국사에서 돌십자가가 발견됐다. 이 신라시대 유물은 당나라 때 경교(景敎)의 전래 가능성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때 강화조약을 맺기 위해 일본에 간 사명대사는 이탈리아인 신부에게 금십자가 목걸이를 선물받았다고 한다. 해남 대흥사에 보관돼 있던 십자가는 1974년 도난을 당해 사라졌다.
한국 땅에서 천주교에 대한 기록은 1631년 정두원이 명나라에서 천주교 서적을 가져왔다는 것이 최초다. 초기 한국 천주교는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통해 ‘서학(西學)’이라는 학문으로 전래됐다. 십자가는 성서와 함께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처음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한국 천주교는 이때를 한국 천주교 전래 원년으로 친다.
하지만 곧이어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면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초대교회 순교자들도 예수가 걸었던 십자가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믿음과 바꿨다. 순교자들이 십자가에 흘린 피는 한국 천주교회의 씨앗이 됐다. 그 순교자들 가운데 103명은 1984년 성인에 올랐다. 124명은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광화문광장 시복식에서 복자가 된다.
교황은 주교 시절부터 썼던 철제 십자가 목걸이를 그대로 거는 것으로 유명하다. 검소·소박한 성품답게 교황의 금십자가를 거부한 것이다. 대신 언제나 십자가 정신, 순교자 영성을 강조한다. 교황 취임 미사에서도 “십자가 없이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면 우리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십자가가 이 세상의 지혜를 판단할 수 있는 힘을 잃어 헛되게 된다면 우리는 불행할 것”이라는 말도 했다.
세월호 참사로 아들을 잃은 두 아버지가 어제 교황을 만났다. 이들은 한여름 땡볕과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안산부터 팽목항까지, 그리고 다시 대전까지 37일 동안 이천리 길을 걸어왔다. 무게 6㎏의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고서. “300명의 억울하게 죽은 영혼이 십자가와 함께 있다”며 그 눈물겨운 십자가를 교황에게 건넸다고 한다. 교황은 ‘세월호 십자가’를 로마로 가져가기로 했단다.
이 땅에서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어 교황에게 울며 매달리는 유가족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하다. 누가 이들의 십자가를 나눠 질 건가. 세월호 희생자들의 ‘천국으로 가는 문’이 참 멀고도 멀다. 김석종 논설위원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에서 100만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조선시대 순교자 124명을 복자(성인의 전단계)로 선포하는 시복식을 집전했다. 참 장엄하고 숭고하며 은혜가 넘치는 자리였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교회와 한국사회, 그리고 우리는 순교자의 삶을 살고 있는가. 단원고 세월호 희생자 아버지 두분이 200㎞를 메고 걸어와 교황에게 전한 ‘세월호 십자가’가 그걸 묻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 도보순례단이 900㎞를 걸어 교황에게 전달한 '세월호 십자가'/경향신문 사진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 시복미사에 앞서 광화문에서 한달 넘게 일째 단식농성 중인 고 김유민양 아버지
김영오씨(47)를 만나고 있다. /길바닥저널리스트 박훈규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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