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서울 북촌 ‘야곱의 우물’
서울 북촌에 ‘석정(石井) 보름우물’이 있다. 지금은 폐정이 된 채 한길가에 방치돼 있다. 석정은 조선시대 소문난 명천(名泉)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한다. 정조 8년 갑자기 우물물이 요동치며 흘러넘치는 변고가 일어났다. 양반댁 도령을 사모하던 망나니 딸이 우물에 투신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원혼제를 지내준 뒤 보름은 물이 맑고 보름은 흐려져서 보름우물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보름우물은 초기 천주교 역사와도 관련이 깊다. 최초의 외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는 1795년 ‘북촌 심처’에서 이 샘물을 성수(聖水)로 조선땅 첫 미사를 드렸다. 주 신부는 석정골 강완숙 집에서 무려 6년을 숨어지냈다. 강완숙의 도움으로 이 우물을 길어다 비밀리에 교도들에게 영세를 줬다. 말하자면 보름우물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성수이자 포교의 ‘원천’인 셈이다.
신유박해 때 주 신부와 강완숙 등 북촌의 천주교 지도자들이 대부분 순교했다. 이때 보름우물 샘물이 핏빛을 띠면서 물맛이 쓰디쓰게 변하는 이적을 보였다고 한다. 세간에 ‘천주학쟁이’들을 참혹하게 처형한 탓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김대건 성인도 한때 북촌에 숨어지내며 이 샘물을 성수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계속된 박해로 순교자가 늘어나자 물길이 딱 끊겼고, 결국 폐정이 됐다.
성경에 ‘야곱의 우물’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가 이민족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했다는 중요한 우물이다. 현재 팔레스타인 땅인 야곱의 우물 성당은 성지순례 코스로 인기가 높다. 주문모 신부 역시 ‘조선의 사마리아 여인’ 강완숙이 떠온 샘물로 이 땅에 복음을 전했으니 보름우물을 한국판 야곱의 우물이라고 부를 만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 광화문에서 순교자 124명을 복자(성인 전단계)로 선포하는 시복식을 집전한다. 복자 중 주문모, 강완숙, 정약종, 최인길 등 북촌 출신 순교자가 무려 35명이나 된다. 이참에 ‘강완숙 우물’의 수맥을 찾아 우물을 복원하고 순교성지로 가꾸면 어떨까. 교황 시복식에서도 이 샘물을 성수로 쓴다면 그 의미가 한층 돋보일 것이다. 보름우물에는 세계의 주목을 끌 만한 천주교 순교역사의 극적 스토리텔링 요소가 흘러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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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의 가장 중요한 일정 중 하나가 조선시대 순교자 124명을 복자품에 올리는 시복식이다. 우연히 서울 북촌 지나는 길의 대로변에서 ‘석정 보름우물’(계동길 110)을 보게 됐다. 사각형 돌을 동그랗게 쌓아올린 석정(石井)은 물길 끊긴 지 아주 오래됐다. 지금은 우물 입구를 두꺼운 철판으로 덮고 큼지막한 쇠못까지 단단하게 박아놨다.
오래 전부터 경복궁 근처인 북촌 석정골에 있던 이 우물은 물맛이 좋은 데다 득남 효험이 있다고 해서 궁궐 궁녀들도 몰래 길어다 마실 만큼 소문난 명천(名泉)이었단다. 동네 이름까지 석정골로 불렸다. 이 우물이 천주교와 관련이 있다는 안내판이 있지만 그 설명문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천주교 서울 순례길 2코스에 들어있기는 해도 그 중요성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설명문에는 나오지도 않지만 보름우물과 함께 기억해야할 이름이 있다. 조선 최초의 외국인 사제인 주 문모 신부를 목숨 걸고 지켜낸 여자 순교자 강완숙(골롬바)이다. 1794년 국내에 들어온 주 신부는 1795년 4월5일 부활대축일에 ‘북촌 심처’에 있는 역관 최인길의 집에서 조선 최초의 성사(聖事)를 집전했다. 최인길, 정약종, 윤유일, 지황, 최창현, 김종교 등이 조선 땅 첫 미사에 참석했다.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리자 같은 동네인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 집에서 무려 6년을 숨어지내며 밤에 몰래 이 샘물을 길어다가 비밀리에 영세를 줬다.
강완숙은 충청도 내포 양반가의 서녀(첩의 딸)이자 후처 출신. 홍지영과 혼인을 한 뒤 천주교도가 됐다.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남편을 떠나 한양으로 올라왔다. 그가 입교시킨 시어머니와 전처 아들 홍필주가 따라나섰다. 가부장 사회에서 남편, 아들, 아버지를 버리고 가출을 감행한 것이다. 한양 북촌에 자리잡은 강완숙은 열성적인 활동과 리더십으로 조선 천주교의 리더가 됐다. 주 신부는 명도회를 조직하면서 그를 여회장에 임명했다.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여성회장이다.
주 신부가 머무는 그의 집은 성당 겸 천주교 활동의 중심이었다. 그는 전교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그가 전교한 사람만 수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왕실의 은언군 부인 송씨와 그 며느리 신씨 등을 천주교에 입교시킨 것도 그였다. 동정녀와 과부들을 모아 집 주변에 일종의 수도원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기도 했다. 이땅에 복음의 씨앗은 그렇게 뿌려졌다. 아들 홍필주는 주 신부의 복사 역할을 했다.
황사영은 ‘백서’에 조선 교회에서 남녀를 통틀어 강완숙의 지도력을 당할 사람이 없다고 썼다. 남존여비가 엄연하던 시절에 이미 남자와 동등한 위치에서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는 뜻이다. 교회사뿐 아니라 한국 여성사에서도 스스로 남녀평등을 실현하고 여성 활동을 사회로 확장시킨 여성운동가로 평가할 만한 일이다. 그는 주 신부를 보호함으로써 결국 한국 천주교를 지켜낸 일등 공신이기도 하다.
강완숙은 신유박해 때인 1801년 7월 서소문 밖 새남터에서 당당하게 참수형을 당했다. 그의 나이 41살이었다. 그날 남자 교우인 최인철, 김현우, 이현, 홍정호와 함께 그가 신앙의 길로 인도한 여성들인 문영인, 한신애, 강경복, 김연이가 함께 했다. 그에 앞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 윤유일, 최인길, 지황, 최창현, 정약종, 홍교만, 최필공, 홍낙민, 최필제, 윤운혜, 정복혜, 정인혁, 정철상이 순교했다. 아들 홍필주, 사돈 홍익만 역시 새남터에서 그의 뒤를 따랐다. 모두가 석정골 보름우물에서 떠온 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한국 천주교사에 빛나는 특출한 교우이자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이들은 모두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시복식에서 복자(성인의 전단계)로 선포된다.
이들이 순교하자 보름우물이 핏빛으로 변했으니 기적이 따로 없다. 보름우물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성수’이자 천주교사(史)의 ‘원천’이다. 또한 주 신부를 헌신적으로 도운 강완숙은 ‘한국판 사마리아 여인’, 보름우물은 ‘한국판 야곱의 우물’인 셈이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이처럼 한국천주교사의 뜻깊은 성지인 보름우물이 폐정(廢井)된 채 한길가에 방치돼 있는 것이 안타깝다.
항용 종교는 신비와 기적의 스토리로 생명력을 얻는다. 요즘같은 스토리텔링 시대에 한국 천주교는 왜 이리 귀한 기적의 샘물을 방치하고 있는 걸까. 초대 교회의 사적지이자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승리를 입증한 순교자들의 영성을 상징하는 샘물이다.
시간이 촉박해서 이 샘물을 시복식의 성수로 쓰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이 한국판 야곱의 우물인 보름우물을 ‘강완숙 우물’로 명명해 성지로 가꾸면 천주교 순교역사를 보여주는 명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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