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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보

설악산 '무애도인' 오현 스님, 적멸의 길로 가다

by 김석종 2018. 5. 30.

2014년 5월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서울 성북구 돈암동 삼각산 흥천사에서 만난 오현 스님

사진 김영민 기자

 

오늘 설악산 산지기이자, 낙승(落僧)을 자처했던 설악산 신흥사 조실 설악(雪嶽) 무산(霧山) 스님 다비식에는 가지 못했다. 그저 ‘안개 낀 산’(霧山)이란 스님 법명처럼 구름 자욱한 북한산(삼각산)을 설악 영봉인 양 아득하게 바라보며 추모의 마음을 바람에 실어보냈을 뿐이다. 4년 전 5월,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스님이 중창한 삼각산 흥천사 ‘손 잡고 오르는 집’에서 스님을 인터뷰했다. 그 후로 백담사와 흥천사, 그리고 서울 강남 등지에서 가끔씩 스님을 뵈었다.


일반인이 생각하는 스님들과 달리 말과 행동이 괴팍하고 파격적이었다. 그는 늘 막걸리와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았으며, 승속을 떠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특히 문인들과의 교류가 깊었다. 선(禪)과 시조를 결합한 개성적인 시편들로 ‘절간이야기’ ‘아득한 성자’ ‘마음 하나’ 등 시집을 내면서 필명으로 쓴 속명이 조오현. 그래서 오현 스님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스님이 마지막 남긴 시는 ‘天方地軸(천방지축) 氣高萬丈(기고만장)/虛張聲勢(허장성세)로 살다보니/온 몸에 털이 나고/이마에 뿔이 돋는구나/억!’이라는 임종게였다고 한다. ‘천방지축, 기고만장, 허장성세’는 계율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살았던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한 것일까. ‘온 몸에 털이 나고 뿔이 난다’(被毛戴角·피모대각)는 선가(禪家)의 언어로 스님이 평상시에 자주 했던 말이다. 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은 것은 인간이 아닌 짐승이다.

 

오현 스님이 시집 '마음 하나'에 적어준 친필 서명

 

그 깊은 뜻은 알 수 없으되 ‘제대로 중노릇을 못했다’면서 생전에 자신을 늘 ‘낙승(떨어진 중)’이라고 했던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스님과의 대화를 엮어 ‘열흘 간의 만남’을 펴낸 신경림 시인은 오현 스님을 “가장 승려답지 않은, 가장 승려다운 시인”이라고 했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 흥천사에서 스님에게 직접 들은 흥천사 복원 뒷얘기는 그의 국량을 여실히 보여준다. 조선시대 4대문 안의 유일한 사찰로 건립돼 조선 왕실의 보호를 받았던 유서깊은 사찰이었던 흥천사 복원은 조계종단의 오랜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 출범 이후 사찰의 대표권은 조계종에 있었지만 다른 종단 소속 스님들이 점유했다. 게다가 경내에 20여 가구 80여 세대의 무허가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종단에서는 오현 스님을 찾았고, 스님은 불에 탄 낙산사를 완벽하게 복원해낸 제자 정념 스님에게 그 일을 맡겼다.

 

 

첫번째 난관은 경내를 차지하고 있던 민가들을 이주시키는 일이었다. 오현 스님이 직접 나섰다. 스님은 주민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았다. 종이를 나눠주고 원하는 이주비를 쓰라고 했다. “쪼잔하게” 협상할 것도 없이 각자 써낸 이주비를 전액 나눠줬다는 것이다.
“그러면 욕심껏 많이 써낸 사람만 이익을 보는 것 아닙니까.”
“그거야 지 복이지. 그런데 말이다. 사람 욕심이 엄청난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아. 크게 부풀린다고 해도 상식선에서 두 배를 넘는 경우는 없지.”
스님은 막걸리잔을 손에 들고  자글자글한 주름잡힌 얼굴에 작은 눈을 감으며 껄껄껄 파안대소했다.

 

지금 흥천사는 도심 속의 멋진 사찰로 변모했다. 오현 스님이 서울에 올 때 가끔씩 머물던 흥천사 조실채 ‘손 잡고 오르는 집’은 스님이 이름을 짓고 고 신영복 선생이 편액의 글씨를 썼다. 오현 스님은 신영복 선생이 어려움을 겪을 때 도움을 줬다.

 

 

오현 스님에게 어떻게 시를 쓰게 됐는 지 물어본 적이 있다.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 주지가 돼서 진산식(취임식)을 했는데 아무도 오질 않아. 누가 그러대. 내가 시를 좀 쓰니까 시집을 내면 다를 꺼라고. 시집을 낼 준비를 하고 이근배 시인에게 발문(跋文)을 부탁했어. 그러면서 ‘대한민국에서 제일 알아주는 시인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미당 서정주 선생이라는 거야. 그래서 ‘세상에서는 미당이, 절집에서는 조오현이 시를 제일 잘 쓴다’고 써달라고 했는데 써온 발문을 보니 그 말이 없더라고. 그래서 내가 ‘미당은 가꾸는 시, 오현은 버리는 시’라는 말을 집어넣었어.”

 

오현 스님 한글 선시 감상평을 묶은 '이렇게 읽었다'에 실린 스님의 글씨와 그림  

 

그는 이렇게 펴낸 첫시집 ‘심우도’로 문단 안팎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시조시인이자 한글 선시의 개척자로 꼽힌다. 그의 선시 ‘아득한 성자’와 ‘아지랑이’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고 한다. 조오현 작품에 대한 문학평론과 해설, 논문도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스님이 입적하기 며칠 전에도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설악 조오현 선시조 연구’(배우식)가 내게 배달돼 왔다. 2003년 무산 스님이 백담사 인근에 세운 ‘만해마을’은 해마다 만해축전이 열리는 8월이면 전국 문인들이 모여 문학잔치를 열곤 한다.

 

 

오현 스님은 신흥사는 물론이고 백담사, 낙산사, 건봉사, 진전사 등 설악권 불교의 큰어른으로 불교계 안팎에서 ‘설악산 호랑이’로 통했다. 내가 물었다. “스님은 어떻게 설악산 일대 사찰의 맹주가 됐습니까.” “내 쌈 잘 한다. 다 쌈해서 뺏었다.” 스님은 또 껄껄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신흥사와 백담사, 낙산사의 중창과 함께 백담사에 무문관인 무금선원과 조계종립 기본선원을, 신흥사에 향성선원을 개설하는 등 설악불교를 중흥시킨 공로가 쌓인 결과다.

 

 


남다른 호방함과 경계가 없는 자유로움으로 유별난 한 생을 마치고 적멸의 길로 떠난 오현 스님. “세상에서 제일 즐겁고 기쁜 날이 죽는 날이다”라고 했던 스님의 시 ‘적멸을 위하여’를 읊는 것으로 무상(無常)의 상념에 젖어본다.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어차피 한 마리/기는 벌레가 아니더냐//이 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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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1 경향신문 기사>

“모두가 고해(苦海)에 배 띄운 선장들…

                             각자의 허물 돌아봐야”

                                                                글 김석종 선임기자·사진 김영민 기자

 

ㆍ부처님오신날 앞두고 만난 신흥사 조실 오현 스님

 


“모두가 고해(苦海)에 배 띄운 선장들… 각자의 허물 돌아봐야”

 

세월호 참사로 온 나라가 초상집이다. 부처님오신날(6일)을 앞두고 사찰에 내건 연등도 빛을 잃었다. 설악산 신흥사·백담사의 조실(祖室·사찰의 큰어른)이자 시조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설악산 도인’ 오현 스님(82). 지난달 28일 서울 성북구 돈암동 흥천사 조실채에서 만난 노스님은 “천지 만물이 나와 한몸이라는 동체자비(同體慈悲)의 불교사상에서 보면 세월호와 함께 지금 온 국민이 바다에 침몰한 셈”이라며 “남의 허물만 말할 것이 아니라 이 기회에 모두 자기 자신의 이기심을 돌아봐야 한다”고 일갈했다. 짙어가는 신록 사이로 봄비가 처연하게 내리고 있었다. 

 

▲ 다른 이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자비를 베푸는 것이 부처님 뜻
민심은 천심이라 했건만 민심 외면하고 천심을 구하려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선장… 힘 빼고 여유와 친화력 보이길

 

- 이런 때 부처님 오신 뜻은 무언가. 

“작년 피었던 꽃이 올해도 피었을 뿐이다. 그 꽃을 보는 마음이 밝고 맑아져야 한다. 부처님의 자비가 바로 중생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 이 세상에 부처님 오신 뜻이다.” 

- 이번에 가족을 잃은 이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세상의 어떤 말이 위로가 되겠나. 내가 죽도록 좋은 말을 한다고 해도 그저 말일 뿐이다. 다만 저 바다만 바다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물 없는 바다다. 그래서 고해(苦海)라고 한다.”

 

- 청와대, 정부, 여야 정치인들이 다 욕을 먹고 있다. 

“불교 화두에 병정동자래구화(丙丁童子來求火)라는 말이 있다. 불(병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남에게 불을 구하고 있다는 뜻이다. 권력이나 힘만 좇는 요즘 정치꾼들이 딱 그 모양이다. 민심이 천심이라고 했는데 민심은 외면한 채 천심만 구하는 꼴이다.” 

 

- 이 나라의 어른인 게 부끄럽다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 개개인이 고해에 배를 띄운 선장들이다. 자기 허물을 못 보고 남의 허물만 들춰내면 세상이 혼란해진다. 우리는 몽골이 쳐들어왔을 때 총칼 대신 부처님 말씀인 팔만대장경을 만들 정도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그런데 경제가 발전하면서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너무 커졌다. 자기 가족 빼놓고는 관심조차 없다. 그런 이기심을 반성하지 못하면 반드시 또 큰 사고가 일어난다.”

 

- 박근혜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나. 

“아버지한테 배운 걸 죄다 내다버려야 한다.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아버지식 대통령에 집착하고 있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선장이다. 선원들도 역할이 있고 전문분야가 있는데 선장이 자기 혼자 모든 걸 다 하려고 하면 잘한다는 소리 듣기 어렵다. 장관이나 공무원들이 잘못해도 내가 덕이 부족한 탓이라고 할 수 있는 여유와 친화력을 보여야 한다. 대통령이 힘을 빼야 나라가 편안하다. 나라 걱정을 혼자만 하지 말고 야당과 대화하고 국민과 함께해야 불통이란 소리를 안 듣는다.”

 

- 불교가 어렵다는 사람들이 많다. 불교의 진리가 어디 있나. 

“절에 부처 없다. 각자 자기 자신이 미완의 부처다. 불사선 불사악(不思善 不思惡), 즉 선에도 집착하지 말고 악에도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차별과 분별심을 버리라는 것이 불교다. 불교를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불교 가르침은 우리 속담에 다 들어 있다. 팔만대장경을 줄이면 ‘사람 차별하지 마라’,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하지 마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가 전부다.”

 

오현 스님은 강원도 불교계의 좌장이다. 신흥사·백담사 외에도 불타서 복원한 낙산사, 진전사 등 설악산 일대의 모든 사찰을 관장한다.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만해상과 만해축전을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산중 선승이면서도 고은, 신경림, 조정래, 이근배 등 문인을 비롯해 내로라하는 정치인, 학자, 관료, 종교인들과도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다. 그의 화려한 인맥은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에 받아줬고, 이소선 여사 등 어려운 재야인사들도 도왔다. 기행으로 유명했던 중광 스님도 말년을 그에게 의탁했다. 

- 스님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가 궁금하다. 

 

“다 헛소문이다. 내가 아니라 설악산과 백담사, 만해축전이 좋아서 오는 사람들이다. 본래 사람 차별 안 하는 게 중노릇이다. 전 전 대통령은 미망(迷妄) 때문에 백담사까지 왔다. 승적을 박탈당한 중광 스님은 말년에 중으로 죽고 싶다고 해서 백담사에 거처를 마련해줬다. 나 역시 제대로 된 중은 못되고 낙승(落僧)이다. 장미가 아무리 고와도 길가의 패랭이꽃 향기와 빛깔은 갖지 못한다. 그것처럼 내가 모르는 세계,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이 무진장한 법이다. 선악, 크다 작다, 잘났다 못났다는 생각이 다 분별심이다.”

- 낙산사 화재 땐 어떤 마음이었나. 

 

“나무 법당이 불타는 것은 자연법칙이고 부처님 법이다. 스님들에게 호들갑 떨 것 없다고 했다. 네 몸 태우는 탐(貪·욕심), 진(瞋·성냄), 치(癡·어리석음) 삼독(三毒)의 불부터 끄라고 했다.”

- 지난해엔 그동안 공들여 운영해온 만해마을을 동국대에 통째로 기부해서 화제가 됐다.

 

“원래 내 것이라는 게 어딨나. 가진 게 없는 것이 무소유가 아니라 집착하지 않는 것이 무소유다. 이제 나는 죽을 일만 남았다. 내가 죽고 나면 만해와 인연이 있는 동국대가 잘 운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자들에게 맡기면 반드시 시비가 생긴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더 가지려고 하는 데서 싸움이 일어난다. 돈은 버는 바 없이 벌고, 쓰는 바 없이 써야 한다.” 

- 스님에게 시는 수행과 같은 것인가. 

 

“뿌리는 같지만 조금 차이가 있다. 내게 선(禪)은 나무의 곧은 결이고, 시는 나무의 옹이 점박이결 같은 거다. 선은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고, 시는 인생이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스님은 시 ‘아득한 성자’를 낭독했다)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내가 가만히 보니까 뜨는 해 지는 해 봤으니 더 볼 거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가 성자다.”

- 어떻게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나. 

 

“매화꽃을 찾아서 산과 들을 헤매다 지쳐서 집에 돌아오니 뜰 안에 매화가 피어 있더라는 고사가 있다. 행복을 밖에서 구하지 말고 가까운 곳, 자기 안에서 찾으라는 말이다.”

▲ 오현 스님은?  
193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7살 때 절간 소머슴으로 맡겨져 출가했다. 법명은 무산(霧山), 호는 설악(雪嶽)이지만 필명인 조오현 스님으로 통한다. 설악산권의 신흥사·백담사·낙산사 등을 중창, 복원하는 등 ‘설악산 산지기’를 자처하며 평생을 보냈다. 무애자재(無碍自在)한 언행과 기행의 일화가 수두룩하다. 한때 미국에서 접시를 닦으며 만행을 했다. 1968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했다. <아득한 성자> <적멸을 위하여> 등의 시집으로 정지용문학상, 공초문학상, 한국문학상, 고산문학대상 등을 받았다. 1997년 만해상을 제정해 만델라, 달라이라마 등 세계적인 인권·평화 운동가들에게 시상했다. 현재 제자 정념 스님을 통해 서울 성북구의 쇠락한 고찰인 흥천사를 중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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