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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보

나전칠기 첨단 디자인 미술가 김영준

by 김석종 2015. 4. 18.

[김석종 만인보}

나전칠기 첨단 디자인 미술가 미술가 김영준

 

빌게이츠 게임 박스, 프란치스코 교황 의자 자개옻칠로 만들어
냉장고, 휴대전화, 호화 유람선·요트, 항공기, BMW 자동차에도 접목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은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주창한 탁월한 문장론이다. 연암은 “법고에 집착하면 때묻을 염려가 있고, 창신에만 경도되면 근거가 없어져서 위험하다”고도 했다. 어디 문장뿐일까. 모든 세상살이에 두루 들어맞는 이치일 터다. 요 근래 전통공예의 법고창신에 꽤 근접한 듯한 나전칠기(자개옻칠) 작가 김영준(56)을 자주 만난다. 거푸 만나면서 기존 장인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사내와 의기투합하게 된 거였다.

나전칠기는 전복 등 조개의 속껍질(자개)로 문양을 만들고 그 위에 옻칠을 하는 것이지만, 김영준의 작업은 좀 더 새롭고 특별하다. 천년 동안 비전(秘傳)된 전통 자개공예로 현대미술, 그것도 추상회화까지 나아간다. 나전칠기를 첨단 과학기술 상품과 명품 인테리어에 접목하는 것도 남다른 주특기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비디오 게임기 엑스박스(X-box) 케이스에 매화·나비 문양의 자개옻칠을 한 게 바로 김영준이다. 빌 게이츠가 먼저 한국 나전칠기의 가치를 알아보고 동양과 서양, 전통문화와 첨단 IT산업의 융합과 콜라보레이션(협업)을 제안했다고 한다. 빌 게이츠는 2008년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 이 엑스박스를 선물했다. 김영준은 이 작업으로 미술계에서 확 떴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나중에 선물용으로 100개를 더 주문했다. 이 작업은 아마도 동양 전통예술인 자개가 세계 초일류 IT상품 디자인에 동원된 첫 쾌거였다고 해도 될 거다.

 

김영준이 내세우는 자랑거리가 하나 더 있다. 작년 여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해 명동성당 미사를 집전할 때 앉았던 ‘역사적인’ 의자를 그가 만들었다. 교황 의자는 전체적으로 까만 옻칠을 하고 높다란 등받이 뒷면에 교황 문양을 자개로 박아넣었다. 그 문양이 작고 담박해서 검소한 교황의 품성과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들었다.

알고 보니 그는 장인에게서 혹독하게 배운 공예인과는 거리가 멀다. 거의 독학하다시피 자개와 옻칠을 공부했다. 전승을 중시하는 인간문화재 입장에서는 근본 없는 돌연변이랄까(하긴, 생물학에서도 돌연변이를 진화의 출발점이라고 한다). 살아온 내력 역시 파란만장하다. 강원대 공대를 나온 ROTC 장교 출신. 젊어서는 큰 증권회사의 애널리스트였다고 한다. 매주 방송에 출연해 투자 분석을 할 정도로 잘나가는 증권 전문가였다니 그것도 예상 밖이다.

 

 


애널리스트라는 직업이 말이 좋아 ‘자본주의의 꽃’이지 실제로는 날마다 희비가 요동치는 ‘자본주의 정글’이라고 했다. 대박과 쪽박 사이에서 처절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친한 동료가 암에 걸려 사망하면서 회의가 밀려왔다. 증권사 경력 딱 10년을 채운 1994년 촌각을 다투는 소모품 생활과 영영 굿바이했다. “미쳤다”고 원망하는 아내와 초등학생 두 딸을 보면서 와락 겁이 나기도 했다. 가구회사 대표인 친구를 찾아갔다가 나전칠기 공예가를 만난 건 운명이었단다. 첫눈에 자개와 옻칠의 오묘한 색감에 반했다.

한때 자개장롱·보석함 등으로 각광받았던 나전칠기가 이미 사양길인 줄 알았단다. 하지만 증권맨의 감은 남달랐다. “남이 가는 반대 방향에 ‘꽃길’이 있다는 주식 격언이 있다. 시세가 바닥일 때 투자해야 이문이 큰 법이다.”

새 인생의 출발 또한 엉뚱했다. 전통공예를 하기로 결심했으면서 미국행을 택했으니. 이런 게 김영준식 역발상이다. 혼자 ‘노가다’로 학비를 벌면서 LA 아트&디자인아카데미스쿨에 다녔다. 고생고생 끝에 공부를 끝내고 2년 만에 돌아왔다. 이번엔 IMF 사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구 회사 친구는 부도 상태였다. 그 친구와 무허가 건물을 빌려 수공예 가구를 만들었다. 일이 없을 때는 택시운전까지 했다고 한다.

전통 장인들을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그다지 배울 게 없었다. 심지어 고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옻칠 대신 합성도료인 ‘카슈’ 칠을 해서 후다닥 물건을 뽑아내는 이들도 많았다(우리나라 나전 공예의 현실이 그러하다). 어렵사리 돈을 모아 옻칠로 유명한 일본 가나자와에 가서 칠기 기법을 배워왔다. 그 후에도 이탈리아 도무스 아카데미에서 디자인 특별과정, 서울산업대 IT 디자인대학원 등에서 공부하면서 나전을 현대에 맞게 진화시키겠다는 처음의 결심을 밀어붙였다. 작업 공정도 현대화했다. 자개의 입체감을 내는 기법, 옻 원액 정제 기술, ‘컬러 옻칠’ 기술 등으로 특허를 냈다.

‘인생 이모작’을 시작한 지 꼬박 10년이 지나서야 원하는 대로 ‘작품’이 나왔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한국공예대전, 문화관광상품대전에 잇따라 입상했다. 나전과 칠기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따랐다.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개인전 20여회, 단체전 500여회를 했다. 특히 해외 전시에서 호평을 받은 게 빌 게이츠의 관심을 끄는 계기가 됐다. 게임박스 작업 이후 국내외 기업들에서 주문이 밀려들어 꽤 재미를 봤다. 김치냉장고, 휴대전화, 최고급 한방화장품 케이스, 호텔 욕실, 호화 유람선과 요트, 비행기 일등석, BMW 자동차 등에도 자개를 박고 옻칠을 했을 정도다.

김영준이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센터에서 오는 25일부터 3월28일까지 개인전 ‘나전칠기, 그림이 되다’를 연다. 전시 준비 작업 중인 그를 따라가서 작품을 미리 감상했다. 제일 눈길을 끄는 건 원형의 나전 회화인데, 마치 영롱한 진줏빛 오로라와 무지개를 보는 듯 눈부셨다. 나사에서 찍은 우주 사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채화모란나전장, 화초장에 담아낸 민화 속 모란꽃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탁자, 콘솔, 의자, 소반, 항아리, 찻잔 같은 생활 가구나 공예 소품은 단순하면서 우아하고 모던하다. “한국 전통미를 보여주되 새롭고 현대적인 색감과 디자인으로 천년의 빛을 되살려내고자 했다.” 이번 전시가 끝나면 K아트센터와 손잡고 말레이시아, 스위스, 싱가포르, 중국 등의 해외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자개옻칠 작품은 재료가 비싸고, 손이 많이 가고, 제작 시간이 많이 걸리는 탓에 값이 비싸다. 그럼에도 마니아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미래는 밝다. 만날 때마다 김영준이 털어놓는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다. 플라스틱, 도자기, 가죽에도 자개옻칠을 실험했다는 그는 앞으로 LED나 광섬유 빛을 자개와 융합시키겠다고 했다. 나전과 현대 예술·디자인의 접목을 통한 ‘전통의 재구성’으로 우리 시대의 문화 명품을 탄생시키겠다는 게, 전략적으로도 훌륭해 보인다. 이게 제대로 된 법고창신 아닌가. 김영준이 그걸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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