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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보

재야 기타 최고수 ‘와이키키 브라더스’ 최훈  

by 김석종 2015. 4. 18.

 [김석종 만인보]     

언더 최고수 기타리스트 ‘와이키키 브라더스’ 최훈  

 

 

 음악인들 사이에선 그냥 ‘기타 초이’로 통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밴드의 기타리스트 최훈(58) 얘기다. 기타 실력만 따진다면 같은 세대 재야 기타리스트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한다(나머지는 대체로 이중산, 김광석을 꼽는다).

 

 밤무대 삼류 밴드의 사그라드는 꿈과 고된 현실을 그린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기억하는지? 그렇다면 이미 최훈에 대해 반쯤은 아는 거다. 한때는 잘나갔지만 디스코와 노래방 열풍에 밀려 단란주점, 룸살롱, 소도시나 시골의 썰렁한 나이트클럽, 지방축제를 떠도는 영화 속 와이키키 브라더스 밴드 리더 성우의 모티브가 바로 최훈에게서 나왔다. 거기 깔린 음악들도 대부분 최훈과 그의 밴드가 연주하는 곡을 쓴 거였다(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도 나왔다).

 

 

 최훈이 ‘황종음밴드’란 이름으로 서울 여의도 KBS 별관 옆 경도상가 지하의 라이브 카페 ‘바바리바’(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고 한다)에서 일할 때다. 임순례 감독과 함께 언더그라운드 록그룹에 대한 영화를 준비 중이던 명필름 제작자 이은이 바바리바에 왔다. 이은은 뛰어난 테크닉과 충만한 소울, 그리고 삼류 ‘딴따라’의 정서를 고스란히 간직한 최훈에게 필이 팍 꽂혔단다. 시나리오에 최훈의 생생한 경험담이 들어가면서 영화가 제대로 길을 잡았다.

 

 영화는 2001년 나왔다. 내가 바바리바에서 최훈을 처음 만난 것도 그 무렵이다. 황종음밴드가 쏟아내는 다이어 스트레이츠, 이글스, 산타나, 시시알, 밥 딜런에 빨려들었다. 지미 헨드릭스, 게리 무어, 제프 벡, 올맨 브러더스를 연주하는 최훈의 기타에 감전됐다. 그 후 가끔씩 만나 포장마차 같은 데서 소주잔 기울이는 사이가 됐다. 늘 겸손하고 과묵했다. 누구처럼 ‘음악 합네’ 하고 무게를 잡거나 가식 떠는 일이 없어서 좋았다.

 

 한번은 최훈이 클래식 기타를 배우러 다닌다는 얘길 했다. 한국판 지미 헨드릭스라는 말을 듣는 실력 ‘짱짱한’ 프로 아티스트가 새로 기타를 배운다고? 스페인 기타 거장 안드레스 세고비아의 제자인 스미즈가 스승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에서 야쿠자들에게 새끼손가락이 부러진 뒤 한국 여성과 결혼해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도 연주 실력만은 대단했는데 과거보다 기량이 떨어졌다며 스스로 공식 연주를 접었단다. 과연 고수는 다르다. 최훈도 그랬다. “기타가 사람처럼 느껴진다니까.” 기타 스스로 감정을 토해낸다니, 참 대단한 경지 아닌가.

 

 최훈의 이야기는 2003년 소설로도 나왔다. 그 제목도 <와이키키 브라더스>다. 영화와 다른 건 주인공 최기타의 인생을 통해 언더그라운드 밴드와 록음악을 조명한 ‘음악소설’이라는 점이다. 가수이자 음악평론가인 구자형이 썼다. 영화와 소설이 나온 뒤로 밴드 이름을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바꿨다(그는 원치 않았지만 구자형이 그렇게 밀어붙였다고 했다).


 
 그러자 언론의 관심도 뜨거웠다. 이쯤 되면 재빨리 대중적인 앨범을 하나 내 대박을 노릴 만도 한데, 그는 안 그랬다. <인간극장>이라는 TV 프로그램 출연 요청도 거절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때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쳤다며 아쉬워한다. 그는 가난한 뮤지션의 초라한 삶을 팔아먹는 게 싫었다고 했다. 그에게는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적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겠지만, 한편으론 참 미련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도 소설도 어쩌다 보니 그리됐을 뿐 스스로 욕심 내서 도모한 일은 아니다. 그에게 영화 속 성우나, 소설 속 최기타는 ‘미화’된 최훈이고, 꾸며진 얘기다. 최훈은 고교 1학년 때 아버지 사업이 실패했고, 학교를 때려치웠다. 기타에 미쳐서 살았고, 손가락에 피를 철철 흘리며 득음(?)을 위해 연주에 몰두했다. 열아홉 살 때 벌써 ‘잭슨4’라는 이름으로 미8군 무대에 설 정도로 음악적으로 조숙했다. 한때는 어깨를 덮는 장발에 마리화나와 약물에도 손댔단다. 그러다가 군대에 가서 정신 바짝 차렸다.


 
 제대 후 주찬권(드러머·2013년 사망), 최구희(기타), 이환규(베이스)와 함께 ‘믿음소망사랑’을 만들었다. 최훈은 두 장의 앨범을 냈던 그 시절이 음악인생의 황금기, 밴드생활의 하이라이트였다고 말한다. 그룹 ‘템페스트’를 거쳐 전인권의 ‘들국화’에 합류했지만 금방 그만뒀다. 주찬권과 최구희는 들국화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 “나하고는 안 맞더라고. ‘그것만이 내 세상’ 같은 곡들이 애들 장난 같아서….” 그러니 음악에 관한 한 타협을 모르는 원칙주의자인 게 분명하다.

 

 그러고는 카바레, 룸살롱, 나이트클럽, 각종 파티까지 전전했다(영화는 이 부분을 부각시켰다). 때로는 대리운전까지 했다. 오직 음악을 하겠다고 그런 고된 밥벌이를 한 거였다. 지금까지 최훈이 리더로 활동한 언더 그룹이 20여개나 된다. 길은정, 백영규, 소리새, 김세화 등 수많은 음반에 세션으로 참여했고, 틈틈이 기타 연주 앨범도 냈다. ‘빛을 찾아서’ ‘도시의 이방인’ ‘메아리’ ‘조개탄 난로와 은하수’ 같은 창작곡도 만들었다. 2012년에 케니G 내한공연에서 기타를 친 건 대단한 자랑거리다.


 
 얼마 전 오랜만에 최훈을 만났다. ‘빈크리에이션’의 대표인 음악기획자 이상호와 요즘 홍대 앞 인디뮤직계에서 가장 ‘핫’하다는 젊은 밴드 ‘줄리아드림’ 멤버가 동석했다. “겉멋 부리거나 흉내내지 말고 너희들 것을 해라. 진심을 담아야 한다.” 40년 내공의 언더그라운드 ‘전설’이 홍대 앞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충고가 묵직했다.

 

 태생적으로 아웃사이더인 게 분명한 최훈을 세상에 끌어낸 것도 이상호다. 비틀스에게 정신적 동지인 브라이언 앱스타인이 있었다면 최훈에겐 이상호가 있달까. 그 세월이 20년이다. 이상호는 대단히 비상업적인 이 늙다리 기타리스트를 지미 헨드릭스나 신중현으로 만들려고 무진 애를 쓴다.

 

 최훈의 첫 개인 콘서트를 마련한 것도 이상호다. 2007년 봄 서울 종로의 한 공연장에서 열린 그 콘서트를 보러 갔었다. 최훈이 나이 쉰, 음악인생 30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건 공연에 감격해서 울먹이던 기억이 난다.

 그 후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정기공연 무대를 꾸민다. 얼마 전 서울 서교동 롤링홀에서 ‘최훈&와이키키 브라더스 봄 기타’ 콘서트를 열었다. 음악 지망생들에게도 관심이 많다. 아이들을 지도하고 상담을 하는 음악캠프를 여는 이유다. 장애인 청소년들에게도 기타를 가르친다. 일종의 재능기부다. 5월에는 강원 양양으로 음악여행을 떠날 예정이란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친구 수철이 성우에게 묻는다. “너, 행복하니?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 하면서 사니까 행복하냐고?” 성우는 대답을 못했다. 최훈에게 똑같이 물어봤다. “내겐 음악만이 유일한 위로였지. 이제는 남들에게 사막에서 만나는 오아시스 같은 음악을 들려줄 수 있을 거 같아.” 모든 것이 휙휙 바뀌는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순수하고 아날로그인 최훈이 요즘 아주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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