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단성사
1907년 서울 종로에 문을 연 단성사는 그대로 한국 영화의 역사였다. 1919년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가 이곳에서 상영됐다. 1926년에는 나운규의 <아리랑>이 개봉돼 장안을 들끓게 했다. 1935년에는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이 상영됐다. 영화·연극·음악·무용 발표회와 권투 등 스포츠행사도 이곳에서 열렸다. 1932년 당대 최고의 가수 이애리수가 ‘황성옛터’를 처음 부른 곳이 단성사였다. 당시 울음을 터뜨리는 관객들 때문에 일본 순사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공연을 중단시켰다고 한다.
광복 이후 1990년대까지는 개봉관 시대였다. 서울 종로와 을지로, 퇴계로 주변에 자리한 단성사·대한·서울·피카디리·국도·중앙·명보·스카라·국제극장이 서울 시내 10대 개봉관(1번관)으로 불렸다. 개봉관에서 상영이 끝난 영화들은 계림·화양·대지·서대문극장 등 재개봉관(2번관)으로 갔다. 변두리의 재재개봉관(3번관)에서는 한 번에 두 편의 영화를 ‘동시상영’했다.
당시 종로3가 단성사는 개봉관 중에서도 인기 최고였다. 외국 대작들이 주로 상영됐다. 외국 배우들의 팬 사인회도 단성사가 단골이었다. <겨울 여자>(1977년·58만5000명), <장군의 아들>(1990년·67만9000명), 그리고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서편제>(1993년) 등 화제작들도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당시 이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이 종로4가 쪽으로 길게 줄을 섰던 기억이 난다. 암표가 정상 가격의 2~3배에 팔리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등장하면서 개봉관 시대는 끝났다. 극장 앞에 세워졌던 ‘매진사례’ 표지판, 손으로 그린 영화 간판 등도 아련한 추억이 됐다. 단성사 역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새 건물을 지어 멀티플렉스로 변신을 시도하다가 부도처리됐다. 최근 단성사 건물을 인수한 새 주인은 이곳을 영화와 관계없는 오피스 건물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로써 단성사 영화관의 역사는 108년 만에 완전히 끝났다. 한국 최고(最古)의 영화관이 흔적없이 사라지는 모습이 안타깝다. 새 건물에 옛 영화관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라도 마련됐으면 한다.2015.4.22
광복 이후 1990년대까지는 개봉관 시대였다. 서울 종로와 을지로, 퇴계로 주변에 자리한 단성사·대한·서울·피카디리·국도·중앙·명보·스카라·국제극장이 서울 시내 10대 개봉관(1번관)으로 불렸다. 개봉관에서 상영이 끝난 영화들은 계림·화양·대지·서대문극장 등 재개봉관(2번관)으로 갔다. 변두리의 재재개봉관(3번관)에서는 한 번에 두 편의 영화를 ‘동시상영’했다.
당시 종로3가 단성사는 개봉관 중에서도 인기 최고였다. 외국 대작들이 주로 상영됐다. 외국 배우들의 팬 사인회도 단성사가 단골이었다. <겨울 여자>(1977년·58만5000명), <장군의 아들>(1990년·67만9000명), 그리고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서편제>(1993년) 등 화제작들도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당시 이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이 종로4가 쪽으로 길게 줄을 섰던 기억이 난다. 암표가 정상 가격의 2~3배에 팔리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등장하면서 개봉관 시대는 끝났다. 극장 앞에 세워졌던 ‘매진사례’ 표지판, 손으로 그린 영화 간판 등도 아련한 추억이 됐다. 단성사 역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새 건물을 지어 멀티플렉스로 변신을 시도하다가 부도처리됐다. 최근 단성사 건물을 인수한 새 주인은 이곳을 영화와 관계없는 오피스 건물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로써 단성사 영화관의 역사는 108년 만에 완전히 끝났다. 한국 최고(最古)의 영화관이 흔적없이 사라지는 모습이 안타깝다. 새 건물에 옛 영화관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라도 마련됐으면 한다.2015.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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