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장소이동만 말고 ‘깊은 여행’을 떠나라
여행에서 우리는 새로운 경치를 보고, 낯선 사람을 만나고, 멋진 추억을 안고 돌아오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산과 바다의 감상, 이국의 풍물과 특별한 경험을 자랑하기도 한다. 이처럼 모두가 유쾌한 여행을 꿈꾸지만 피곤한 기억으로만 남은 여행도 적지 않다.
<깊은 여행>은 가서, 보고, 놀다, 돌아오는 식의 여행에 대한 통념을 확 바꿔주는 책이다. ‘뉴요커’지의 기자로 30년 이상 활동해온 저자 토니 히스에게 ‘진짜 여행’은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날 그는 집을 나선 몇 분 동안 색다른 경험을 한다. 익숙했던 세상이 갑자기 ‘미답(未踏)의 경지’처럼 보였다고 한다. 길모퉁이에 있는 우편함우편함은 여전히 생명 없는 물건 그대로였지만 갑자기 특별한 파장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낯설고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
이건 마치 선승의 깨달음과도 같은, 여행에 대한 ‘한소식’이랄까. 그날 이후, 그는 여행자들이 가까운 곳이나 먼 곳, 혹은 이국적인 장소를 여행하면서 그런 생각의 전환을 맞은 경험들을 살펴보게 된다. 그러면서 많은 것을 얻은 여행과 그저 어느 곳에 갔다가 돌아왔을 뿐인 통상적인 여행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기억에 남는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도중의 어딘가에서 마음의 또 다른 부분으로 들어가며, 고유한 흥미와 관심사와 방법론의 영역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음이 이런 방식으로 움직이면 여행의 경험도 바뀐다.’(12쪽)
저자는 반드시 낯선 장소로 떠나지 않아도, 언제 어디에서든 할 수 있는 이런 여행을 ‘깊은 여행’이라고 부른다. 어딘가로 떠남으로써 일상에 정체되어 있는 감각과 의식을 깨우고, 이 의식의 여행을 통해 숨은 잠재력을 발휘하며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선정(禪定)의 고요’와도 같은 ‘깊은 여행’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는 깊은 여행은 얼핏 몽상이나 꿈, 상상과 유사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보다 깨어 있는 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누구에게나 잠재된 능력이며 언제든 불러들여 선택하고 연습하고 기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게나 선천적으로 잠재된 능력이라고 했다. 따라서 여행을 하는 동안 깊은 여행을 시도하고 연습하고 기억하고 점점 더 그 비율을 늘려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행은 우리의 시야를 넓혀 주고 마음의 가장 내밀한 차원을 복원시키면서 정신의 날개를 들어 올리는 발사대이자 투석기다.’(16쪽)
책의 제1장에서는 ‘깊은 여행’이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가지로 설명한다. 깊은 여행은 고유의 독특한 맛이 있다. 깊은 여행은 권태를 없애줄 뿐만 아니라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경험이 될 때도 있다. 비 온 후의 햇살같이 세부적인 것들을 밝게 드러내주지만 어떻게 보면 은은한 달빛과 좀더 닮아있다. 깊은 여행은 꿈꾸는 중임을 알면서도 꿈을 꾸는 상태인 자각몽과 비슷한 데가 있다. 이미 깨어 있는 상태에서 더욱 더 깨어나는 느낌을 준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이 전에 없이 얼굴에 빛이 나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 없이 마음 속에서 한 발짝 비켜서는 일이 깊은 여행의 출발점이다. 그는 이런 비유들로 ‘깊은 여행’을 말하고 있다.
물론 그동안 해온 ‘잘못된 여행’을 바로잡는 게 먼저다. 사람들은 이동하는 데 소비하는 시간이 매우 부담스럽지만 필요하기 때문에 참고 견뎌야 할 힘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여행에서 느끼는 비참함, 좌절, 실망 등은 이런 왜곡된 생각의 결과일 뿐, 여행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깊은 여행을 통해 우리가 자신의 내면 안에 늘 있었던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면 시간 감각도 새로워진다. ‘즉, 지푸라기 시간을 황금 시간으로 자아내는 것이며, 시간 속의 시간을 적어도 어떤 한계에 이르기까지 끌어내는 것이다.’(198쪽) 깊은 여행이 우리를 더 큰 ‘여기’로 데려갈 때마다 시간은 새로운 혹은 더 긴, 더 깊은 ‘지금’으로 지속되고 얼마든지 늘릴 수 있는 순간(시간 확장)이 된다는 것이다.

2003년 뉴욕 대정전 당시의 모습. 토니 히스는 어두워진 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새로운 감각을 느꼈고, 이것이 여행의 체험과 비슷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 21세기북스 사진
‘화두’로 내세우지만 않았을 뿐이지 저자보다 앞서 ‘깊은 여행’을 경험한 이들은 많다. 저자는 그런 ‘선각자’들을 통해 깊은 여행의 방법을 알려주는 데 책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동서고금의 문학작품과 여행서의 저자와 각 분야 전문가들의 문장과 경험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토마스만의 소설 <마(魔)의 산>은 깊은 여행의 ‘모범’으로서 가장 많이 인용된다. 저자는 여행자들의 여행기록과 문학작품의 주인공들이 우리 안에 있는 ‘제2의 여행자’라고 말한다. 여행자와 동식물학자들의 책, 그리고 소설과 시에서 깊은 여행의 ‘좁은 통로’를 얻게 된다고 한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여행에 관한 에세이가 아니다. 여행을, 특히 ‘깊은 여행’을 주제로 삼아 시도한 하나의 학술논문이나 연구서로 읽힌다. 저널리스트답게 문학·철학·고고학·인류학·수학·지리학·물리학·정신생리학·곤충학·교통공학 등의 풍부한 지식, 최근의 기사와 통계·연구결과 등 다양한 정보를 동원한다. 인류의 걷기와 함께 시작된 여행, 그 여행의 역사와 그에 따른 의식의 변화까지 탐구대상이다.
특히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이해를 돕는 형식으로서 깊은 여행의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우리의 육체와 정신의 움직임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을 소개하면서 깊은 여행의 필요성을 설득한다. 여행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인류가 얻은 최초의 선물’이라는 게 저자의 통찰이다.
이제 우리의 여행은 저 먼 우주에까지 나아가 달에 인류의 발자국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인간은 ‘작은 것에 안주’하는 태도에 길들여졌다. ‘갈릴레오 이후’에는 새롭게 등장하는 탈것들, 그리고 통행로(도로·항공로)들 때문에 깊은 여행으로 들어가는 오래된 관문이 무력해졌다. 움직이는 것(여행) 자체가 더욱 온전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깊은 여행>은 여행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함께 여러 가지 실천 방법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 책이 집요하게 탐구하는 깊은 여행의 열정들이 오히려 독서를 방해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때로는 너무 장황하고 비약이 심해서 도무지 집중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느 곳에 있든 ‘깊은 여행’의 감각을 깨우라는 말은 여행의 지침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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