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째 은둔 수행 ‘왕년의 승려 시인’ 사자암 향봉 스님
전북 익산 미륵산 중턱. 수직에 가깝게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300m쯤 올라가면 앞뒤로 커다란 바위를 두르고 있는 사자암(獅子庵)이 나온다. 향봉(香峰) 스님(61)은 거기 있었다. 지난 15일 사자암에서 왕년의 ‘스타 승려’ 향봉 스님을 만났다. 그는 이 조그만 암자에서 상좌(제자), 공양주(절에서 밥을 짓거나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도 없이 홀로 8년째 은둔 수행 중이다.

15년 동안 인도, 티베트, 네팔, 중국 등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사자암에 은둔 수행 중인 향봉 스님은 “욕심은 버릴수록 아름답고, 집착은 키울수록 병이 된다”고 말했다. 익산 | 박민규 기자 parkyu@kyunghyang.com
▲ 90년대 초 ‘나’를 찾아 떠난 길
인도·네팔 등지 떠돌며 깨달음
“불교의 핵심은 좌우없는 중도”
-어떻게 지내나.
“저녁 여섯 시에 잠들고 자정에 일어난다. 홀로 밥지어 먹고, 글 쓰고, 산책한다. 이곳에선 신도들을 위한 기도나 49재, 합격 기도 같은 걸 하지 않는다. 내가 목탁치고 염불한다고 영가의 업장이 소멸될 리 없다. 극락왕생은 가당찮은 이야기다. 시험에 합격시켜줄 능력도 없다. 내게 굳이 49재를 부탁하면 쌀 한 말 받는 걸로 통일했다. 나는 법회에 나가도 돈을 받지 않는다.”
-불교에서 49재 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사찰에서 신도들의 신앙심을 이용해 몇 백만원부터 천만원씩 돈을 받는 건 한국불교의 장삿속이다. 마치 대리운전하는 식으로 스님이 기복을 부추기고 해결사인 양 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스님들이 열반했는데 호화 꽃상여로 치장하고, 만장을 줄줄이 앞세운다. 이것이 유교 풍습이지, 불교 가르침인가. 출가 수행자는 무소유, 무집착해야 하는데 세속에서도 하지 않는 육순 잔치, 칠순 잔치를 하는 것도 못마땅하다.”
다짜고짜 한국 불교계를 비판하는 스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하고, 말은 거침없었다. 그는 1962년 초등학교 5학년 때 전남 백양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선방을 거쳐 스물 여섯 살에 불교신문사 편집국장을 맡았고 주필, 주간, 부사장을 지냈다. 조계종 총무원 포교부장, 총무부장, 중앙종회 사무처장, 종회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불교계 ‘실세’였다.
일반에는 승려 시인 이향봉으로 더 유명했다. 1970년대 <사랑하며 용서하며>, <무엇이 이 외로움을 이기게 하는가> 등 베스트셀러 저자로 유명세를 떨쳤다. 역시 승려 시인으로 베스트셀러 <옷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을 쓴 정다운 스님의 동생이다. 그런 그가 1990년대 초 한국땅에서 홀연 자취를 감췄다. 인도에서 3년, 네팔에서 2년, 티베트에서 3년, 중국에서 7년을 떠돌았다고 했다.
-왜 떠났나. ‘화려한 과거’가 그립지 않았나.
“그건 허송세월이었다. 내장사 주지를 하는 동안 간절하게 철이 들었다. 부처님 진리에 목말랐다. 더 늙기 전에 부모님으로부터 몸 받기 전(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나’는 누구인지, 그 주인공을 알고 싶었다. 그걸 해결하기 전엔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의사소통도 되지 않는 인도땅에서 돈이 떨어져 노숙을 하다시피 했다.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도 넘겼다. 그래도 몸과 마음을 던져서 부처님 가르침에 다가섰다. 그러던 어느날 아! 하는 찰라지간에 지견(知見)이 환히 열리는 종교 체험을 했다고 한다.
-어떤 체험인가.
“무엇을 묻든 막힘없이 답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경전과 선어록에 대한 의문도 깨끗이 해결됐다. 전생과 현생이 나뉘어져 있는 게 아니라 이 마음이 윤회할 뿐이란 걸 알았다. 지킬과 하이드가 한 사람인 것처럼 흔들리고 허덕일 때는 축생(짐승)이 된다. 그렇게 매 순간 윤회한다. 지나간 세월은 전생이다. 그때 과거의 향봉은 죽었다. 지금의 내가 현생의 향봉이다. 마음을 제대로 쓰면 언제나 지금이 바로 황금기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건가.
“종교적인 아름다운 체험이라고 해두자. <천수경>은 그 시작에서 ‘정구업(淨口業)’을 강조한다. 모두들 구업(입조심)으로 해석하는데 나는 코 밑의 입만 입이 아니라 귀는 듣는 입이요, 눈은 보는 입, 생식기관은 배설하는 입으로 금방 이해가 됐다. 즉 팔만사천 털구멍, 세포 하나하나가 입 아닌 게 없다. 정구업을 몸과 마음을 맑게 하라는 뜻으로 풀이하니 의문이 싹 풀렸다.”
<금강경>에 나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도 마찬가지다. 불교 학자들도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생각을 내라’라고 번역하면서도 설명에서 헤맨다고 한다. 스님은 “‘한 생각이 일어났거든 마땅히 그것에 집착하지 말라’고 풀이하면 뜻이 분명해진다”며 “습관과 집착을 버리면 자유롭고 행복해진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15년의 치열한 구도행을 끝내고 2004년 귀국해 사자암에 들어앉았다. 스님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09년 가을, 지리산 야단법석에서다. 사형인 도법 스님이 그를 불러냈다. 그는 작심한 듯 “한국 선원에서 좌선에만 치중하면서 스님들의 의식까지 앉은뱅이가 됐으니 깨달은 도인이 나올 수 없다”며 “5대 총림 큰스님 누구도 진실로 마음이 열렸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그는 시자가 대신 써주는 큰스님 법어, 안거를 끝낸 스님들에게 수백만원씩 주는 과도한 해제비(여비) 등을 문제삼았다. 그것도 사찰과 큰스님의 실명을 들먹였다. 해당 절집의 스님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는 “사자암의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 누구든 찾아오면 법거량(선문답)을 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했다.
경상도 대표사찰의 스님이 찾아왔다. “몸과 마음에 한 물건도 지니지 않았는데, 그 다음 공부는 어떻게 합니까.” “놓아버려야지요(放下着).” “한 물건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그 생각마저 놓아버려야지요.” 화가 잔뜩 난 건장한 체격의 스님들은 사자암 입구에서 진돗개를 만났다. “사자암이라더니 사자(獅子)는 보이지 않고 개짖는 소리만 요란합니다.” “눈(眼)은 없고 귀만 달랑 붙어 있어 그런 겁니다.” “그렇다면 사자를 보여 주시오.” 향봉 스님이 외쳤다. “악!”
하지만 불교계 비판 이후 더 이상 그를 부르는 야단법석은 없었다. 그는 2011년 스스로 겪은 법거량 일화를 담은 <선문답>, 한국 불교계를 비판한 <일체유심조>, 그리고 시집 <행복을 위한 자유를 위한>을 펴냈다. 과거의 명성에 비하면 반응은 시원치 않다. 스님은 “본시 내 것이랄 게 없으니 집착도 없다”며 “어렵지만 자유롭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산다”고 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 해 뜨는 곳이 동쪽이고, 해지는 곳이 서쪽인 것처럼 불교는 ‘내’가 주인공이고 세상의 중심인 종교다. 그것이 불교의 핵심인 중도다. 모서리에 앉아도 그곳이 나에게는 중앙이 된다. 유교의 중용이 좌우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이라면 중도는 좌우가 없고 변두리가 없다. 임제선사가 말한 수처작주(隨處作主·가는 곳마다 주인)다. 모든 사람이 아웃사이더가 아니고 인사이더다.”
향봉 스님은 “생각이 바뀌면 운명이 바뀌고 마음이 열리면 세상이 열린다”며 “모으고 쌓아두려는 집착을 버리고 풀어주고 덜어내고 베푸는 마음으로 한 생각을 돌리면 행복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말을 맺었다. 어느새 미륵산에 어둠이 내리고, 향봉 스님 홀로 사자암에 남았다. 발 아래 익산 평야가 아득했다.
<익산 | 김석종 선임기자 s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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