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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여적/ 자화상

by 김석종 2015. 3. 30.

여적/ 자화상

 설악산 백담사 오현 스님이 석달 전 문자를 보냈다. “노망이 들어 무문관에 있습니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 스스로 무문관(無門關·밖에서 문을 걸어잠그고 수행하는 방)에 들어가 하루 한 끼만 먹으며 겨울을 났다. 시조 시인으로도 유명한 스님은 <아득한 성자> 등 시집에 늘 동그라미와 눈썹만으로 단순한 얼굴을 그려주곤 한다. 이게 스님의 자화상인데, 불교적인 무심(無心)의 심상이 느껴진다. 김수환 추기경의 자화상도 동그라미 안에 눈과 코, 입을 간단한 선으로 쓱쓱 그린 뒤 ‘바보야’라고 적었다. 추기경의 자화상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바보나눔재단’의 심볼로 쓰인다.
 램브란트, 고흐, 고갱, 피카소, 베이컨 등 걸출한 화가들의 자화상은 단순한 얼굴의 형상화가 아니라 깊은 내면세계의 정신과 영혼까지 담아낸다. 미당 서정주는 시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했다.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으련다.’ 윤동주의 시 ‘자화상’은 식민시대 청년이 우물에 자신을 비쳐보며 자기를 성찰하는 것으로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다.
 전남 해남의 고산 윤선도 고택 녹우당에 공재 윤두서 자화상(국보 240호)이 있다. 소품이지만 조선조 초상화의 백미로 꼽힌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형형한 눈빛, 힘찬 구레나룻과 수염에서 엄청난 기운이 느껴진다. 고산의 증손자인 공재는 집안이 당쟁에 휘말리자 출사를 포기하고 해남으로 귀향했다. 자화상에는 낙향의 참담한 심경과 고독, 사대부의 강인한 자존심이 투영돼 있다고 한다.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 중 혼외자 의혹으로 퇴진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지방에서 은둔·칩거하며 수개월간 자화상을 그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흉할 정도로 망가진 모습이었는데, 점차 안정된 얼굴로 변해갔다는 전언이다. ‘미술 치료’를 받듯 자화상을 그리며 분노를 삭인 걸까. 자화상은 주로 거울을 보고 그린다. “거울에 비춰보면 의관을 단정히 할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신의 허물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정관정요>에 나오는 말이다. 지금 우리 자화상은 어떠한가. 원망과 분노보다 평화로운 얼굴로 그려졌으면 한다.  김석종 논설위원 20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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