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백석 시집
“신살구를 잘도 먹더니 눈 오는 아침/ 나어린 아내는 첫아들을 낳았다/ 인가 멀은 산중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짖는다/ 컴컴한 부엌에서는 늙은 홀아비 시아버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백석의 시 ‘적경(寂境)’이다. 1936년 나온 시집 <사슴>에 실렸다. 산중 외딴 마을 홀아비 시아버지가 출산한 며느리를 위해 미역국을 끓이는 모습이 애틋하다. 이 시집은 100부 한정판으로 발간한 까닭에 당시에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시인 윤동주도 도서관에서 필사본을 만들어 간직했다는 것이다.
백석은 분단 정국에서 거의 50년간 잊혀진 이름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그는 월북시인도 아니다. 광복 후 월남하지 않고 고향인 평북 정주에 남았을 뿐이다. 북한에서도 적응을 못하고 협동농장으로 하방(下放)돼 1996년 사망했다. 하지만 1988년 월북문인 해금조치 후 단숨에 한국현대시의 중심으로 확 떴다. 얼마 전 시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사슴>이 한국 현대시 100년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집 1위를 차지했을 정도다. 2014.11.13
당대의 멋쟁이 ‘모던 보이’였다는 백석의 연애담도 뒤늦게 화제가 됐다. 유명 요정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기부해 길상사로 만든 ‘자야’(본명 김영한)가 주인공이다. 그는 함흥 권번 기생으로 백석을 만난 뒤 평생 간직해온 절절한 사랑을 <내사랑 백석>이란 책으로 펴냈다. 이번에는 또 <사슴> 초판본이 경매에 나왔다고 한다. 문화재로 등록된 김소월의 <진달래꽃> 초판본 못지않게 구하기 어렵다는 희귀본이다. 시집은 현재까지 모두 4권의 존재가 확인된 상태다. 경매 시작가만 무려 5500만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백석의 시는 경매 대상이 아니다. 가령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 나라 잃은 시인이 만주벌판을 방랑하며 얻은 빼어난 시편도 우리 모두의 것이다.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벌써 잎새 떨구는 나뭇가지에 겨울이 걸렸다. 올겨울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처럼 매력적인 백석 시집을 읽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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