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만인보

'사나이 DNA' 물씬한 삼국지 그린 이현세

by 김석종 2013. 9. 30.

 #이현세의 예쁜 두딸이 출연하는 SBS 프로그램 동영상이 재미있네요. 맨 아래 첨부돼 있습니다.

 

1990년대 중반, 이현세(59)가 경향신문에 ‘러브 컬렉션’을 연재한 적이 있다(우리나라에서 스포츠신문이 아닌 종합일간지에 대중만화를 연재한 건 이게 최초였다). 그 연재만화를 담당하면서 그의 술자리에 끼는 일이 부쩍 늘어났다.

 ‘현세 형’을 따르는 각계의 수많은 유명 무명씨들로 언제나 술자리는 흥성거렸다(그는 대한민국 대표 마당발이기도 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년에 삼백일 넘게 그렇게 마셔댔던 그다.

 

 

김상민 그림



 

강남 포이동 이현세 작업실의 책상 연필통엔 늘 뾰족하게 깎은 데생용 연필 수십 자루가 꽂혀 있었다.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정성스레 연필을 깎는 게 일이었다. 그 진지한 표정과 손놀림이 마치 일전을 앞둔 사무라이가 칼을 가는 것 같았다. “데생하다가 연필심 촉감이 상쾌하지 않으면 김이 팍 새거든….”

아마도 이현세보다 예리하게, 연필을 잘 깎는 이는 이 세상에 없을 거다. 그 연필을 날카로운 검처럼 쑥 빼들고 쓱싹 쓱싹, 선 몇번 그으면 어느새 독특한 머리모양의 까치와 매혹적인 여인 엄지가 웃거나 울면서 나타나는 거였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이현세는 한국만화의 빛나는 중심이었다. 암울한 1980년대 야구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확 떠버린 ‘강한 남자’ 까치(오혜성)와 ‘청순가련한 여우’(이주향 교수의 표현) 엄지, ‘이기적인 엘리트’ 마동탁, 그리고 덩치 큰 백두산은 <지옥의 링> <떠돌이 까치> <며느리밥풀꽃에 관한 보고서> <아마게돈> <카론의 새벽> <블루엔젤> <폴리스> <남벌>에서도 변함없이 종횡무진, 이현세라는 이름 석자를 일찌감치 만화계 지존의 자리에 우뚝 올려놓았던 거다(여기서 만화의 줄거리를 말하는 건 참 부질없는 짓일 게다).

이현세표 만화는 디테일과 스케일, 캐릭터에서 단연 발군이었다. 선 굵고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 사나이들의 비장한 승부 앞에서 깜빡 죽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나. 여성들은 별처럼 슬프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매력적인 ‘마초’, 까치에 열광했다. 심지어 허영만도 “그때는 이현세가 일인자였다”고 인정했던 바다. 만화를 대본소가 아닌 서점에서 판매한 것도 이현세가 처음이란다. 이현세 만화는 속속 영화로, TV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강한 것이 아름답다”거나 “난 네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는 대사는 그 시절의 유행어였다. 이현세는 보리밭 한가운데서 캬아~ 맛깔나게 맥주를 마시는 맥주 CF모델로도 영화배우 뺨치게 잘생긴 얼굴을 세상에 알렸다. 그러다가….

SF만화 아마게돈을 직접 애니메이션 영화로 제작해서 왕창 말아먹는 일이 벌어졌다(아마게돈은 24억원을 투자해 겨우 8억원쯤 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망한 만화영화로 기록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천국의 신화>가 음란물 제작혐의로 6년이나 법정다툼을 벌이고서야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고는 참 오랜만에, 이현세를 다시 만났다. 그새 피차 몸이 망가져서(그는 지난해 초 위암 수술을 했다) 술 담배는 딱 끊은 처지였다. 좀 수척했지만 얼굴은 맑았다. “수술 후 아주 착해졌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아무리 그래도 왕년의 술꾼끼리 재회하는 마당에 어두운 밤 시간을 맹숭맹숭하게 보내기는 참 뭣했다. 결국 애니메이션을 하는 그의 후배 두 명과 술집(식당)에서 합세했다. 이현세는 끝내 술 한방울도 입에 대질 않았다. “일년 뒤에는 마실 수 있다니까 그때까지 참아야지. 얼마 안남았어.”

 


어쩌면 이제 이현세 전성시대는 저물었다. 그는 깨끗하게 그걸 인정했다. 올해는 외인구단을 선보인 지 30년이 되는 해다. 그 사이 새로 태어나 자란 아이들은 까치와 엄지를 잘 모른단다. 인터넷 웹툰이 극화 만화를 대체한 지도 오래다. 이현세는 소송 등으로 먹구름 잔뜩 낀 채 지나간 40대에 처절하게 ‘나’를 돌아봤다고 한다. “나를 알아가는 세월이 곧 삶 아니겠나.”

 

이현세는 그동안 한국만화가협회장,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을 했다. 16년째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제자들을 키워낸다. 삐딱했던 야성의 사나이도 결국은 ‘꼰대’가 됐달까(그래도 권위적인 꼰대 냄새는 전혀 풍기지 않으니 참 다행이다). 작품은 골프만화 <버디>와 한국사, 세계사 등 아이들의 학습용 역사만화를 쭉 내놨다.

그런 이현세가 이번에는 ‘삼국지’를 그렸다. 3년의 작업 끝에 완성했다는 열권짜리 가족용 <이현세 만화 삼국지>는 글맛과 그림맛에서 역시 명불허전이다. 그는 수많은 영웅호걸이 장렬한 서사를 만들어내는 삼국지를 통해 요즘 아이들에게 부족한 ‘야성의 DNA’를 일깨우고 싶었다고 했다. 이현세 삼국지가 빛나는 지점 또한 인물 캐릭터다. 조자룡은 까치, 사마의는 마동탁 캐릭터를 입혔다. 감상 포인트는 한 번도 배신한 적이 없는 남자 조자룡과, 한 번도 배신 안 한 적이 없는 남자 여포의 대결이다. 일반 보급판이 아닌 성인용 한정판도 따로 1000부를 찍었다(베틀북출판사에 연락하면 구할 수 있다). 영화로 치면 ‘무삭제 감독판’이다.

 

 '현세형'이 <만화 삼국지>에 '진인사대천명', '김석종 아우님.... 긴 세월을 함께 해서 좋았지. 이제 다시 또 시작하자구. 혹시 알아? 온 길보다 남은 길이 더 멋있을 지!!"라는 글을 적어줬다.

 


이현세에겐 남다르게 굴곡진 가족사가 있다.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일제에 총살당했다. 할머니 홀로 세 아들을 키웠다. 둘째 아들이 한국전쟁 때 인민군 장교가 되어 나타나면서 온가족이 ‘좌익’의 멍에를 썼다. 셋째 아들의 장남이었던 이현세는 아주 어릴 때 큰 아버지의 양자가 됐다.

경주 ‘촌놈’이 전국단위 사생대회에서 늘 상을 받았지만 색약이어서 미대에 못 갔다. 숙모라 불러온 이가 어머니고, 사촌 동생이 바로 친동생(만화가 이상세)이라는 걸 안 것도 그 무렵이다. 충격과 혼란으로 방황하다가 만화계에 들어갔다.

이현세 만화에는 그런 인생사가 투영돼 있다. ‘그늘진 영웅’ 까치, 세속적인 명예와 승부에 집착하는 마동탁은 동전의 양면처럼 딱 붙어있는 자신의 분신이라고 했다.

그는 일흔살이 되면 동화만화를 그릴 작정이다. 이현세는 아내와 두 딸, 아들과 함께 산다. 딸 주명(34)과 엄지(31)는 미모가 빼어난, 세칭 ‘골드미스’다. “손자들과 손자뻘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동화를 그려주는 할아버지”는 그가 꿈꾸는 노년의 모습이다. 그때까지는 십자군 원정과 칭기즈칸, 그리고 수호지, 서유기, 초한지 등 역사 대작에 도전해 볼 생각이란다.

이현세에게 만화는, ‘밥’이고 ‘심장’이다.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만 그리는” 웹툰 시대의 젊은 작가들은 그런 절박함과 치열함이 부족한 거 같다. 그는 ‘사나이 냄새’ 물씬한 텍스트, 삼국지를 통해 진짜 남자들의 우렁우렁한 사자후를 들려주고 싶었단다. 여전히 강하게 빨아들이는 이현세표 만화 삼국지에 어느새 또 꼼짝없이 말려들었다!

 

 

 

 

미모의 이현세 딸, 주명(34, 오른쪽)과 엄지(31)<sbs>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