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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보

백두산만 20년 찍은 '또라이' 산 사진쟁이 안승일

by 김석종 2014. 2. 2.

※2014년 1월29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김석종의 만인보] 20년 꼬박 백두산 사진만 찍은 ‘산 사진쟁이’ 안승일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추가해 다시 썼습니다.

 

 

   2007년 겨울 영하 40도의 백두산 용문봉 폭설 속에서 후배 사진가 안의호가 찍은 안승일. 원래 '백두'인 그의 머리와 수염에 상고대가 피어 마치 동면하는 곰의 모습이다. 그는 20년 동안  한민족의 조종산(祖宗山)이자 단군신화의 무대인 백두산 사진을 찍으며 마늘 먹고 사람이 되어 단군을 낳았다는 곰에 더 가까워졌다.

 

 

 

   ■만주벌판에서 동면하며 백두산을 '발견'하다

  1994년, ‘또라이’ 산악인 사진쟁이 안승일(68)은 (‘만인보’가 소개한 적이 있는) ‘또라이’ 산악인 글쟁이 박인식이 백두산 가자고 꼬드기는 통에 인천항에서 배를 탔다. 북한땅 삼지연으로 해서 장군봉에 가야지, 그까짓 중국쪽으로 가는 게 무슨 백두산이야. 그렇게 투덜투덜대면서 난생처음으로 천문봉에 올라갔다.
 

 

  그랬는데, 백두산과 천지를 보자마자 복받치는 경외감으로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리고 말았단다.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이 산’에서만 ‘저 산’을 제대로 보는 이치로, 한반도에서 보면 중국 장백산이고 중국 쪽에서 찍어야만 진정한 백두산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는 거다. 안승일은 이때부터 꼬박 20년 세월을 백두산에만 매달려서, 백두산 사진만 줄기차게 박았다.


 아예 백두산 하늘 아래 첫동네 이도백하(二道白河)에다 작업실을 차렸다. 1년 중 8개월 이상은 이곳을 전진기지 삼아 백두산을 헤메고 다녔다. 간첩질로 오해한 ‘변방참’(국경수비대 초소부대)에 체포된 일도 여러 번이다. 그동안 날씨도 여러번 좋았는데 그만큼 봐줬으면 얼른 찍고 갈 일이지, 왜 그리 오랫동안 국경을 어슬렁대느냐는 거였다. 나중에는 그 군인들과 도수 높은 중국술을 나눠마시며 두터운 우정을 쌓았다.

 

 

 장군봉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인 백운봉에 두어달 텐트 치고 틀어박히고, 용문봉 무단 입산자 통제소에는 강아지까지 한 마리 데리고 석 달씩 얹혀 살기도 했다. 백두 ‘흰빛’이 가장 눈부신 겨울철은 수은주가 보통 영하 30~40도, 심할 때는 50도까지 꼬나박는 천지 주변 눈구덩이에서 “곰처럼” 동면했다. 일출 하나 건지려고 서백두 청석봉 산마루에 눈구덩이를 파고 들어앉은 게 “100번에서 1000번 사이”란다. 2000년이 시작되는 밀레니엄도 천지 한가운데 눈벽돌로 담을 두른 천막집에서 맞았다.

 

 눈보라 땜에 밖에 못 나가면 천막집에서 김치전 부치고, 눈 녹인 물로 커피 타 마시고, 멸치 육수 내서 칼국수도 해먹었다. 한번은 원경 촬영용 붓박이 초대형 삼각대인 30m 높이의 산불감시용 철탑에 올라갔다가 사진기를 떨어뜨려 박살이 났다. “내가 안 떨어졌으니 됐지 뭐.”

 

   언젠가는 휠체어 신세를 지고도 기어이 네발로 기어서 몇달간 산에 올랐다. 헬기를 빌려 타고 항공사진을 찍는 호사도 누렸다. 그게 다 지금은 10년지기, 20년지기가 된 한족 동무들 덕이란다. 그들이 없었던들 이십년이 아니라 한오백년을 살았대도 못했을 일이었다.
 

 

   “고생은 무슨. 없는 거 없이 다 갖춰진 천막집 지어놓고 떵떵거리며 살았지. 날마다 사는 게 신나고 일이 즐거웠다니까.” 그 안승일을 백두산에서 만난 게 1998년 여름이다. 하늘빛에 따라 매순간 신비하게 변하는 천지 물빛에다 백두대간의 정점에서 한반도의 산들을 호령하는 장군봉과 열여섯 봉우리들을 일일이 손으로 가리키며 자세히 설명해주던 기억이 새롭다.

 

 

 

 

 

 

    백두산이 허락하는 찰나의 순간, 딱 거기에 있기.
 그런 안승일 사진에는 백두산 장기체류자가 아니면 찍을 수 없는 장면들이 수두룩하다. 백두산은 기상변화가 심해서 일년에 이백일은 눈비가 내리고 날마다 거센 바람이 심술을 부리는 곳이다. 하늘이 잠깐잠깐씩만 허락하는 ‘진경의 순간’은 눈깜짝할 새 휙 사라져버린다.

 

 하나의 사물에는 하나의 말 뿐이라는 ‘일물일어설’을 그의 사진으로 가져가보면 일물일점설이 될 성 싶다. 하나의 피사체에는 단 하나의 촬영포인트만 주어지는 거다. ‘어느 한 자리’에다 ‘어느 한 순간’이 더해져서 단 하나의 촬영포인트가 만들어지는 세계다. ‘그 순간에 딱 거기에 있기’가 바로 그의 사진 찍는 방법이다. 테크닉은 두번째다. 그는 사진을 볼때마다 생각한다. 이 사진을 내가 찍기는 정말 찍은 건가.

 

 소아마비로 어릴 적부터 왼쪽 다리를 살짝 저는 안승일은 일찌감치 산에다가 마음을 뺏겼다. 중학교 때는 사진에 취미 붙여 삼각산(북한산)을 오르내렸다. 그때부터 그해 처음 뜨는 해를 본다고 삼각산에 들어갔고, 머리가 커서는 지리산이나 설악산의 텐트 속에서 새해를 맞았다. 건국대 원예과 2학년 중퇴, 그리고 서라벌 예대 사진과도 잠깐 다니다 말았다. 틈만 나면 사진기와 등산장비를 걸머지고 입산했다.

 

 평생 사진 찍다 죽으면 누군가 유작사진집이라도 만들어주겠지…. 그런 바램이었단다. ‘옆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던 시절이어서 가는 데마다 신고를 당해 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곤 했다. 결혼을 하고는 생계를 위해 충무로에 스튜디오를 내고 광고사진을 찍어 돈을 아주 잘 벌었다. 그때는 돈이 생기는대로 궤짝에 던져놨다.

 

 어느날 오백만원이 든 묵직한 돈배낭을 메고 아버지께 갔다. 그때 경기 시흥 달동네, 20여㎡(6평)짜리 아버지 집이 100만원쯤 했다. 평생 철도원으로 산 아버지가 호통쳤다. “야 이눔아. 집을 늘릴 게 아니라 네 사진집을 만들어야지.” 그렇게 훌륭한 아버지 때문에 첫번째 사진집 <山>이 태어났다. “그때 어머니, 아버지께 십만원씩이라도 드릴 껄….” 안승일은 그걸 아직도 후회한다.

 

 경제적 여유가 생긴 뒤로는 삼각산을 찍기 위해 북한산 백운산장으로 출퇴근했다. 강화, 일영, 팔당에도 각각 방을 얻어 몇년간 작업했다. 차도 샀고 필름 살 돈도 걱정 없었다. 그런 식으로 사진집 <삼각산> <한라산> <굴피집>을 냈다. 백두산을 만나고는 1년 동안 찍은 사진들로 <백두산>을 펴냈다. 사진집을 낼 때마다 사재를 털었다.

 

 안승일은 평생 체크무늬 남방셔츠에다 후줄근한 점퍼만 고집한다. 어머니 장례식도 검정 점퍼 하나 걸치고 치렀다. 1998년 부산에서 북한의 김용남과 함께 백두산을 주제로 한 남북 사진작가 2인전을 열었다. 마침 부산에 들른 김대중 대통령이 전시장에 왔는데 정작 안승일은 거기 없었다. 양복 입고 넥타이 매기 싫어서 서울로 내뺐단다.

 

 평생에 딱 한 번 소위 정장차림이란 걸 해봤다. 2001년 평양에서 남북공동사진전을 열었을 때다. “김정일 형님 오신대서 악수하고 사인도 받으려고” 넥타이 매고 기다렸다. 딱 30분 동안. 전시회에 김정일은 안 왔다. 그의 고집스런 산사진 열정과 함께 산악계와 사진계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얘기다.

 

 안승일은 광복 50년(1995년) 8월15일, 이런 일기를 썼다. ‘정일이 형님, 백두산 금강산 사진 필요하시면 일본 사람 또 부르지 마시고 내가 좀 찍게 해주시오. 사진은 재주나 기술로 되는 게 아닙니다. 혼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민족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김일성 주석이 일본 사진작가 이와하시와 구보다를 초대해 백두산 사진을 찍게 한 일이 있었다. 안승일은 이 사진을 백두산 곁다리 사진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했다.)

 

 

 


 

  ■더 이상의 백두산 사진은 없다.

 안승일은 “감히 백두산의 영혼을 찍고자 했다. 더불어 백두산에 숨쉬는 민족혼도 담으려고 했다”고 힘차게 말한다. 그러니 작업에 소용된 20년이 넉넉하기는 커녕 오히려 빠듯했단다. 이번에 그 대단한 사진들을 서울 한복판에 내걸었다.

 

   지금까지 찍은 백두산 사진 수만컷 중에서 추리고 추려낸 60점을 지난 20일부터 다음달 18일까지 예정으로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전시중이다. 혼자서 3300여㎡(1000평)나 되는 5개층 9개 전시실을 모두 채웠다.

 

 박인식은 안승일로서는 첫 개인전인 이 전시회 제목을 ‘불멸 또는 황홀’이라고 붙이고 전시 도록에 일일이 해설을 달았다. 안승일의 예술혼에 감동받은 아라아트센터 김명성 대표는 대규모 전시장을 몽땅 쓰도록 선뜻 허락했다. 말하자면 이 전시는 세 ‘또라이’의 합작품이다.

 

   전시장에 걸린 길이 15m 너비 2.3m짜리, 너비 5m 길이 10m짜리 초대형 작품은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진다. 대부분 너비 4m 길이 1.5m가 넘는다. 지하 1층에서 지하4층까지 중정이 뚫린 건축구조로 돼 있는 아라아트센터가 아니면 걸기 힘든 크기다.

 

 이 초대형 작품들을 걸려고 안승일의 평생 산동무인 고령산악회 늙수그레한 회원들이 노련한 암벽등반 솜씨로 천장에 자일을 걸고 매달리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그 덕에 산행 때 걷는 위치에 따라 조망이 달라지는 것마냥 여러층을 오르내리며 아주 특별한 백두산을 만날 수 있다.

 

   산에 간다고 누구나 다 산을 보는 게 아니듯, 이토록 다각적이고 다양한 입체감,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백두산 사진은 여태껏 못 봤다. 안승일 전에도 없었고, 안승일 뒤에도 있을 수 없는 백두산이다. 아무리 백두산에 가봤자 이런 풍경 못본다.

 

  안승일이 백두산에 바친 건 열정만이 아니다. 젊어서 광고사진 찍어 벌어둔 부동산까지 거의 모두 털어넣었다. 안승일 사진은 하나 빠짐없이 옛날 사진기에 필름넣어 찍은 것들이다. 디지털 카메라로는 산의 깊이와 넓이를 찾아낼 수 없다고 믿는 탓이다.

 

   그 사진들은 무쇠솥에 장작불로 갓 지은 밥과 같다고 박인식이 말해줬다. 가령 여느 사람이 때깔 고운 조모락지 승용차라면 그는 커다란 바윗돌을 한 차 가득 싣고 며칠이고 달릴 수 있는 대형트럭이라고도 했다. 그런 차량은 많은 연료를 필요로 한다. 그는 소문난 대식가라는데, 그 엄청난 식욕은 대형트럭의 엄청난 연비와 한통속이다.

 

 

 

 

  

  ■민족통일의 오래된 약속, 백두산

   안승일은 한민족의 조종산(祖宗山)이자 단군신화의 무대인 백두산에서 마늘 먹고 사람이 되어 단군을 낳았다는 곰에 더 가까워졌다(그의 별명이 백두산 곰이다). 그런 애니미즘 신앙을 가졌던 고대 사람 같달까.

 

   그는 백두산의 천태만태의 순간마다 딱 그자리에 있었던 첫번째 인간이다. 지금까지 백두산의 시공간 속으로 그보다 멀리 걸어들어간 사람은 없다. 그렇게 매번의 사진이 그의 첫 사진이 됐다. 매번의 사진이 그의 마지막 사진이 됐다. 그러니 뭣보다도 그의 백두산은 영(靈)과 기(氣)와 원시적인 신비를 웅혼하게 담아내고 있는 ‘유일한’ 백두산이다.
 

 

  전시회 개막식 날(24일), 원래부터 머리가 하얗게 센 ‘백두’의 안승일은 전시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서 “이제 더 이상의 백두산 사진은 없다. 통일이 될 때까지 더는 백두산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어느 누구도 백두산을 더 잘 찍을 수 없다는 자신감이다. “사진 재주가 어무리 좋단들 나처럼 혼자 산속에 눈구덩이 파고 먹고 자면서 사진 찍을, 그런 미친 놈이 어딨어!”

 

 안승일은 자신의 백두산 사진작업이 통일을 위한, 통일 후의 민족화합에 초점을 두었다고 했다. 감상적 통일론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찍은 백두산 사진은 우리 모두가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걸 뼈저리게 말해준다. 그러니 ‘통일 대박’을 말씀하는 이, 거기 가서, 백두산 ‘불멸 또는 황홀’을 만나보는 건 어떨까.

 

 안승일은 통일에도, 백두산에도 시큰둥한 젊은 세대들에게 백두산 민족혼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백두산 사진 전국 순회 전시와 북녘땅 전시가 그의 꿈이다. 이번 전시가 끝나면 처음 산 사진을 시작했던 삼각산을 찍겠단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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