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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보

모하비사막의 고독한 자유인 ‘사진화가’ 김우영

by 김석종 2014. 4. 9.

모하비사막의 고독한 자유인 ‘사진화가’ 김우영

 

 

 

 

 

사진 찍는 김우영(54)이 한 7년 만에 느닷없이 서울에 나타났다. “그동안 사막에서 살았어.” 호들갑 떨지 않고 쓰윽 웃으며 말하는 버릇이 여전했다. 여태도 미혼에다 꽁지머리를 하고 있었다. 사막으로 들어간 사진가라…, 그 삶에 또 와락 호기심이 일어나는 거였다.

붙임성이 썩 좋던 그가 점점 더 심각하고 공허한 표정을 짓던 기억이 난다. 폭음으로 필름 끊어지는 날이 자꾸만 늘어났다. 그리고는 어느 날부턴가 술자리에서 영 볼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 소식을 몰랐다. 한참 뒤에야 김우영이 하던 일을 싹 정리하고 미국엘 갔다는 얘기가 돌았다. 딸린 식구가 없으니 떠나기도 쉬웠겠지, 하고 말았었다.

그랬는데, 김우영은 그때 미치겠어, 답답해, 다 가짜야! 같은 비명을 꾹꾹 눌러 참고 살았다는 거다. 알고보니 남들이 부러워하는 유명세가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켰던 모양이다. 그만큼 사진가 김우영은 잘나갔다. 부산 태생. 마산에서 수산업을 한 아버지는 거제의 김영삼 전 대통령 부친과 남쪽바다 멸치어장을 양분할 정도였단다.

홍익대 도시계획과에 입학해 사진동아리에서 처음 카메라를 손에 들었다. 유명 사진작가 김영수 선생이 우연히 동아리 전시장을 찾았다가 김우영 사진 앞에 딱 맘춰섰다. “너, 사진 계속해라.” 졸업 뒤 잠깐 국회의원 비서관 노릇을 하다가 때려치웠다. 홍익대 대학원 시각디자인과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원래 가진 방랑기와 사진은 궁합이 잘 맞을 것 같아서다. 첫 개인전에 도시개발 현장 사진들을 선보였다. 한 평론가가 뉴 토포그래픽스라고 치켜세웠다.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미국에서 산업화·경제화로 인한 ‘변화된 풍경’을 찍는 이 사진사조가 막 유행을 타고 있었다.

서른 살 때 미국 유학을 갔다. 순수예술계에서 명성 높은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 사진과에 들어가 학부, 대학원 과정을 다시 마쳤다. 렌즈에 투영되는 도시의 신새벽과 야경이 너무나 아름답고 설레서 잠이 아까웠단다. 비 내리는 고속도로와 뉴욕의 새벽을 흑백사진으로 미친 듯이 찍었다(그는 비 내리는 날을 광적으로 좋아한다). 그 작업은 학생과 교수들 사이에 화제가 되곤 했다. 뉴욕에서 연 두 차례 개인전도 성공을 거뒀다.

김우영은 1996년 한국의 한 패션잡지에 편집장 겸 사진기자로 스카우트됐다. 경험삼아 1년만 해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돌아가지 못했다. 10여개 패션매체가 잇달아 사진작업을 맡기고 최고 대접을 해준 탓이다. 당시는 경기가 좋아 광고시장이 호황일 때였다. 김우영은 이 바람을 제대로 탔다. 그는 광고계의 아방가르드였다.




배우 이영애가 모델인 화장품 ‘헤라’ 광고는 혁신적인 광고사진의 전범으로 전해진다. 그후 국내 패션광고 사진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는 스튜디오를 과감하게 벗어났다. 모델들을 들판에 세우고, 비 오는 거리에서 뛰어다니게 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김우영은 대중잡지 표지사진과 별 차이가 없던 우리나라 패션·화장품 광고사진의 이미지를 확 바꿔놨다고 자부한다.

그야말로 거침없이 성공가도를 달리던 시절이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높은 열정만큼 환멸이 따랐다. 돈을 벌고 명성을 얻을수록 생활은 여유를 잃었고, 정신은 피폐해졌다. “재충전할 겨를도 없이 5년을 마구 찍어댔으니 ‘밧데리’가 완전히 나간 거지.”

사회적 의미가 있는 작업으로 돌파구를 찾아보려고도 했다. 2003년 나눔에 참여하는 이들을 찍었다. 2005년에는 동갑내기 산악인 엄홍길과 함께 두 차례 히말라야를 다녀왔다. 장애인 10명이 안나푸르나봉에 도전한 ‘희망원정대’, 등반 중 희생된 산악인들의 시신을 수습했던 ‘휴먼원정대’의 생생한 현장을 기록했다. 강남의 고층 아파트촌 틈바구니에서 재활용품을 모아 살아가는 포이동 넝마공동체의 삶도 사진으로 남겼다.

그런데도 무엇엔가 쫓기는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불건강한 상태로 술에 푹 절어 산 게 그 무렵이다. “그야말로 막장에 ‘매몰’된 기분이었거든. 잃어버린 ‘나’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했어.” 2007년,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스튜디오와 집을 처분한 뒤 가족에게조차 일언반구도 없이 비행기를 탔다.

정처없이 지프를 몰아 1년 넘게 미국 전역을 여행했다. 그러다가 도착한 곳이 LA와 라스베이거스 중간쯤에 있는 모하비사막. 그는 사막 초입의 오아시스 도시 필란에서 모든 방황을 끝냈다. 사막, 햇빛, 공기, 물, 바람 같은 자연의 생얼굴이 거기 있었다. 메마른 황무지지만 우기에는 비도 제법 내린다. 강물을 끌어다 만든 드넓은 호수도 있다. 주변에 거의 폐허로 남아 있는 공장지대도 마음에 들었다. 2에이커나 되는 들판이 딸린 빈집을 빌려 짐을 풀었다.

거기서 꼬박 6년을 고독한 자유인으로 살았다. 그러면서 줄곧 사진을 박아댔다. 컴퓨터 보정 같은 가식을 싹 걷어낸 순수 전통기법, 사진의 기본에 ‘올인’했다. 절정의 한순간을 무한정 기다려 셔터를 눌렀다. 지난해는 ‘물’ 사진으로 LA에서 두 차례 전시를 했다. 호평이 쏟아졌고 작품이 비싸게 팔렸단다. 그리고 이번에 ‘도시’를 주제로 한 대형 작품 25점을 들고 서울에 돌아왔다. 지금 그 사진들이 서울 청담동 박여숙화랑(4월2~21일)에 걸려 있다.

김우영의 사진은 질감과 색감에서 사진보다는 회화에 더 가깝다. 문 닫은 잿빛 공장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모종의 무게감, 육중함으로 단단한 품격을 드러낸다. 마치 어떤 고전극의 무대장치 같달까. 텅 빈 아스팔트 도로의 중앙선과 인도, 그리고 건물 경계선 같은 선들이 사진 화면을 날카롭게 쪼갠다.

그 풍경 속에 내리쬐는 햇빛, 일렁대는 그림자 혹은 그늘, 지나가는 바람소리, 흥건한 빗물의 여운이 아로새겨져 있다. 세월의 때가 묻은 풍화의 디테일에다 붉은색, 푸른색, 오랜지색이 선연하게 드러나는 색채 대비도 매혹적이다. 관람객들이 “꼭 그림 같다”고 감탄했다. 이제는 카메라로 그림을 그리는 ‘사진화가’의 경지에 든 건가.

안그래도 김우영은 물아일체(物我一體), 관조의 한순간을 딱 잡아내려는 수행자처럼 살았다. 앞으로도 자연과 도시의 존재와 소멸, 그리고 공(空)의 모습을 찍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꾸미고 있다. 고독해서 참 행복하다는, 사막의 고행자 같은 이 사내. 당분간 결혼은 못하지 싶다.

김석종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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