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동 길상사 꼭대기에 있는 ‘행지실(行持室)’은 적막했다. 법정(法頂·1932~2010) 스님 첫번째 기일인 11일. 1주기 추모제는 음력에 맞춰 지난달 28일(음력 1월26일) 열렸다. 이곳에서 법정 스님에게 차를 얻어마시던 시간을 떠올리며 대숲 그늘을 서성댔다. 스님 떠난 자리가 공(空)하고 허(虛)했다.
“가시방석이지요.” 약속시간을 넘겨 올라온 현장(玄藏·56·전남 보성 대원사 전 주지) 스님이 긴 한숨을 쉬며 차를 따랐다. 법정 스님의 유지(遺志)를 잇는 시민단체인 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의 새 이사장이다.
송광사 불일암 시절과 서울 법련사 시절 법정 스님을 모셨다. | 김문석 기자
“이 방은 법정 스님이 입적하시고 딱 하룻밤 주무신 방입니다. 이 큰 절에 당신을 위한 방 한 칸도 만들지 않았어요. 법회가 끝나면 아무리 늦더라도 당일로 강원도 오두막으로 돌아가셨지요. 그런 어른의 원칙과 뜻, 무소유의 정신을 받들지 못하고 실망과 상처를 준 것을 참회합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라고 했으니….”
길상사와 맑고향기롭게가 심각한 ‘내홍’을 겪은 뒤끝이다. 스승은 ‘무소유’를 가르쳤으나, 제자들은 ‘소유욕’으로 편을 가르고 미움을 키웠다. 그러니 세간의 손가락질을 피할 길 없다. 현장 스님이 이 모든 일의 뒷수습을 맡았다. 이사 전원과 감사·사무국장은 모두 사퇴했다.
스님은 법정의 속가(俗家) 조카뻘(현장 스님의 어머니가 법정 스님 고종사촌)이자, 절집 조카이기도 하다. 법정 스님의 사형으로 전남 순천 송광사 방장이었던 구산 스님의 제자다. 송광사 행자 시절 불일암을 오가며 법정스님을 모셨다. 서울 법련사에서 스님을 도와 불일회보를 만들기도 했다. 그만큼 인연이 깊고, 신임도 두터웠다.
- 법정 스님이 이런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하실까요.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야단쳤겠죠, 당장 보따리를 싸서 떠나라고 쫓아냈을 겁니다. 스님의 쩌렁쩌렁한 호통과 고함이 들리는 것 같아요.”
-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겁니까.
“사찰과 법인의 조직을 놓고 의견차이가 있었습니다. 주지 덕현 스님이 시민운동단체인 맑고향기롭게를 길상사 산하 신도조직으로 생각한 것이 문제입니다. 맑고향기롭게와 길상사는 독립된 별개의 조직이거든요. 오히려 스님이 맑고향기롭게 운동을 하기 위해 오랫동안 거절해오던 대원각 시주를 받아들여 길상사를 창건했습니다. 덕현 스님은 선방에서 수행해온 아주 모범적인 수행자인데, 사찰의 조직 운영에는 어려움을 겪은 것 같아요.”
- 덕현 스님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다”며 이사진을 강하게 비판했던데요.
“이사들은 법정 스님과 인연이 깊은 스님, 속가 제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순수하게 자기의 시간과 재능을 바쳐서 10년, 15년씩 스님을 따랐던 분들이죠. 보수를 받거나 이익을 바라지 않았어요. 그런데 무슨 비리집단으로 비친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 분들에 대한 오해가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 세상에는 이권다툼과 자리다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친 김에 길상사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 ‘출판 저작권과 법정 스님 이후의 사찰 운영 문제를 둘러싸고 시작된 제자들의 다툼'에 대해 물었다. 그는 한 참을 머뭇거렸다.
“제자들 간에 그런 문제가 있었지요. 스님의 병환이 깊어지면서 다급해진 제자들이 돌이킬 수 없이 잘못된 선택을 했어요. 스님 유고시 저작권과 사찰 운영의 권리를 확보하려는 뜻이었죠. 이 일을 알게 된 스님이 격노해 주지를 바꿨어요. 그 일로 사형과 사제가 적대시하고, 신도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불화가 깊어진 겁니다. 무슨 문제 사찰, 사고 사찰 같은 갈등이 계속됐습니다. 그래도 스님 1주기를 잘 모셨으면 좋았을텐데…. 덕현 스님이 모두가 길상사를 주목하고 있는 1주기에 딱 맞춰 게시판에 불만의 글을 남기고 떠났어요. 스승에게는 누가 되고 서로 간에 오해는 더 커졌지요.”
- 스님의 유언과 당부를 보면 제자들의 불협화음을 예상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스님은 출가자로서 세 가지 원칙을 세웠어요. 절대 주지를 맡지 않는다, ‘기지옷’은 입지 않는다, 상좌는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일곱 명의 상좌를 뒀죠. 길상사를 창건했을 때도 제자들에게 주지를 시키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것이 틀어진 겁니다. 티끌만큼 어긋나면 다 어긋나는 거지요.”
법정스님에게는 덕조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 덕일 등 7명의 제자가 있다. 덕조에 이어 최근 덕현 스님이 주지직에서 사퇴한 뒤 덕운 스님이 새 주지로 선임됐다.
- 법정 스님이 스님에게 길상사 주지를 맡기려고 했는데 도망쳤다지요.
“청학 스님, 지관 스님에 이어 주지를 맡았던 황선 스님이 몇 달 만에 주지직을 내놓고 떠나버렸어요. 스님이 저에게 전화를 해 빨리 올라오라는 겁니다. 스님을 뵙고 하룻밤을 지낸 뒤 도망쳤어요. 솔직히 스님께 누가 될 것 같고 자신이 없었어요. 길상사 주지 일일 ‘현장’ 체험을 했습니다. 하하.”
다음날 법정 스님이 화가 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길상사 안 올거야!” “네, 저는 못하겠습니다.” “내 성질 알지? 끝장이야!”
- 정말 ‘끝장’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죠. 주지를 맡은 첫째 상좌 덕조 스님이 9년 동안 아주 잘했으니까. 그때 길상사에는 정말 맑고 아름다운 기운이 가득했어요.”
- 그런데 마무리가 아름답지 못했군요.
“제자들이 서로 질시하고 갈등하면 한 사람도 성불을 못한다는 말이 있어요. 일을 겪고보니까 그 말이 이해가 돼요. 훌륭한 스승 밑에서 부러움을 받던 제자들이 손가락질당하고, 누구 한 사람 구제받을 수 없게 됐잖아요. 절은 맑지도 향기롭지도 않게 되고.”
- 아직도 문제가 그대로 남아있을텐데, 어떻게 수습할 계획입니까.
“맑고 향기롭게 해야지요. 이사진을 완전히 새로 구성하려고 합니다. 스님이 처음 어떤 마음, 어떤 정신으로 시작했는지 찾아보고 있어요. 스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심없이 사회적으로 회향할 수 있는 사람들로 새 이사들을 모으는 중입니다. 양쪽으로 갈라진 문도(門徒·제자)와 신도들을 화합시키고, 실망하고 상처받아 떠난 회원들도 다시 돌아오게 해야지요. 도반과 형제의 첫 마음을 찾아가면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스님이 곁에 없구나’라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지금….”
현장 스님은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고향 목포에서 고등학교 때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정혜원이라는 절에 다녔다. 법정 스님도 대학시절 같은 절에 다니다 출가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 그는 고교 졸업과 함께 출가를 결심했다.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 머물던 법정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은 “송광사에 가 있어라”라고 했다.
당시 법정 스님은 함석헌·장준하·계훈제 선생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고초를 겪고 서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마 후 법정 스님은 송광사로 내려와 불일암을 지었다. 현장 스님의 나이 열아홉살 때였다.
“행자시절 매일 불일암 공사 현장까지 일꾼들의 밥을 날랐어요. 불일암 짓기 시작할 때 출가를 해 낙성식 때 수계식(1975년 9월2일)을 했으니 저와 불일암은 생일이 똑같죠. 법정 스님이 출타하면 제가 불일암을 지켰어요. 한동안 불일암에서 지내기도 했지요. 함석헌 선생이 불일암에 오셨을 때는 제가 심부름을 했습니다.”
- 불일암 시절 법정 스님은 어떻게 사셨습니까.
“그야말로 단순하게 살면서 아름다움을 추구하셨어요. 불일암 문을 활짝 열어놓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채 차를 마시곤 했어요. 부엌에 ‘먹이는 간단명료하게’라는 글을 붙여놓고 반찬은 세 가지 이상 차리지 않았습니다. 스님이 손수 음식 준비를 하고 안팎을 깨끗하게 청소하셨어요. 워낙 깔끔해서 부엌을 맡길 만큼 스님의 성에 차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정갈하니 불일암을 한번 돌아보기만 해도 청정해지는 기운을 느꼈지요.”
현장 스님은 경남 합천 해인사 강원에 들어가면서 송광사를 떠났다. 그는 해인사 강원 시절인 1982년 ‘해인’지를 창간했다. ‘가야산 메아리’라는 제목으로 성철 스님의 법문을 실었다. 이 법문의 인기 때문에 창간호 2만부, 3호 4만부를 찍는 등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순전히 그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해인지는 사찰에서 펴내는 잡지의 시작으로 한국불교 ‘문서포교’의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해인지는 현재 대표적인 사찰 불교잡지로 성장했다.
어느날 법정 스님이 해인사로 찾아왔다. 당시 법정 스님은 서울 경복궁 옆 법련사에서 포교목적의 ‘불일회보’를 펴내고 있었다. 그는 5년 동안의 해인사 생활을 접고 불일회보 편집장과 ‘불일출판사’ ‘불일서점’ 운영을 맡았다. 법정 스님이 쓴 <효봉 스님 일대기> <보현행품> <법구경>, 민희식 교수의 <법화경과 신약성서> <토마스복음서와 불교사상> 같은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다가 태안사 선방에 참선공부를 하러 가겠다고 하니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선방에서 겪은 체험을 스님께 편지로 올렸습니다. 스님은 격려하는 답장을 보내주시고 그 내용을 ‘샘터’에 ‘산승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실었어요.”
그는 전남 곡성 태안사 선방에서 청화 스님을 모시고 2년을 공부했다. 그후 청화 스님이 한국불교 최초로 미국에 개원한 캘리포니아 삼보사 금강선원에서 한 철(3개월)을 지냈다.
- 법정 스님을 닮은점은 무엇입니까.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라고…. 하하하. 스님은 성품이 올곧고 생활이 정갈하고 군더더기가 없죠. 저는 막 늘어놓고 살아요. 스님은 남에게 폐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하셨는데 저는 늘 의지하려고 합니다. 닮지 못해 부끄럽죠.”
- 그렇다면 스님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그는 “허허” 웃으며 뜸을 들인 후 대답했다.
“현장감 있다, 그래요.”
웃음이 터졌다. 그는 유머감각이 뛰어나다. “법정 스님이 책을 절판한 진짜 이유가 뭔지 압니까. 우리 사회가 너무 ‘교회판’으로 돌아가니까 ‘절판’을 만들려고 하신 겁니다”하는 식이다. 그런 농을 하고 웃지도 않는다. 화제가 바뀌니 대화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사실 유머감각이 뛰어난 분이 법정 스님입니다. 누가 과일을 가져왔어요. ‘여기 조각과 출신 있지? 과일 좀 깎아봐’ 이럽니다. 제주도에서 농장을 방문했어요. 농장 주인이 메뚜기 때문에 농사를 망쳤다며 ‘스님, 제주도 메뚜기 말도 못합니다’ 하니까 ‘응, 육지 메뚜기도 말은 못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순발력 때문에 항상 폭소가 터지죠. 내가 그런 재주는 좀 닮았나.”
- 법정 스님 조카여서 좋은 점이 있었나요.
“스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어요. 스님이 그런 인연을 드러내는 것을 원치 않았고, 저도 밖으로 내세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어요. 출가수행자에게 속세의 인연은 별 것 아닙니다. 그냥 불가의 스승이고 가르침을 받는 제자일 뿐이었죠. 스님 떠나고 나서 언론에 알려지니까 불편합니다.”
- 법정 스님이 다른 스님보다 뛰어난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살아 생전 큰 역할을 하셨고 떠나서도 신화를 남겼죠. 모든 소유물과 저작권을 없애버릴 수 있는 분이 누가 있겠어요.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 10위까지 독차지하는 분이 또 나오겠어요? 재단 부설로 법정사상연구소 설립을 구상하고 있어요. 스님의 다양한 면모를 조명하는 연구를 진행하려고 하는데, 그 하나하나가 모두 엄청나고 위대합니다.”
그는 “문필가, 종교간 대화운동가, 민주화운동가, 역경가, 생태주의자, 미학가, 선승, 차문화선양가로서의 뚜렷한 업적은 세월이 지나도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 손은 글쓰는 선비의 손이 아니라 노동으로 단련된 농부의 손입니다. 80세가 다 되도록 혼자서 자취생활을 하셨잖아요. 당신이 보고 겪고 체험한 것이 아니면 글로 쓰지 않았지요. 직접 겪은 체험과 닦음에서 우러난 글이어서 생명력과 감동이 남다르죠. 스님의 글은 절망과 괴로움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병을 치료하는 처방전, 치유제라고 할 수 있죠.”
- 지금 강원도 오두막은 어떻게 되어 있나요.
“스님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귀양살이 같은 곳에서 차를 마시고 글을 쓰면서 17년을 지낸 곳입니다. 개인 소유지만 대화를 통해 양도를 받아 스님의 중요한 자취로 보존해야지요. 수류산방은 불일암, 길상사와 함께 스님의 체취가 오롯이 담겨있는 곳입니다.”
사리 한 점 수습하지 않고 ‘비구 법정’의 육신은 흩어졌다. 입적 이틀 전 사촌인 현장스님의 속가 어머니가 병원으로 법정스님을 찾아갔다. 둘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처녀 때 팔팔한 기상이 그대로네.” “다음에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 “불일암에 오면 볼 수 있지.” “다리가 성치 않아서 불일암엔 못 가.” “그럼 길상사로 오면 되지.” 현장스님은 스님의 말씀이 불일암의 바람소리, 산골 오두막의 물소리 같았다고 했다. 시간과 공간을 버리고, 몸에서 마음을 천천히 떠나보내는 이의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현장 스님은 법정 스님의 마지막 말씀을 자주 되뇐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라.” 그는 “이 말을 앞날의 가장 무섭고 무거운 가르침으로 삼을 것”이라며 자세를 고쳤다.
현장 스님은 고비마다 그를 찾던 스님의 뜻을 잘 안다. 그는 오늘 또 법정 스님의 호통소리를 듣는다. “내 성질 알지? 제대로 안하면 끝장이야!”
-‘백제 고찰’ 대원사 대대적 중수, 광주 시민문화운동 중심축 활동-
▶현장 스님은…
현장 스님은 1991년 대원사 주지를 맡았다. 백제고찰로 일부 전각밖에 남아 있지 않았던 사찰을 대대적으로 중수했다.
그는 광주 지역의 시민사회단체와 문화운동의 중심축으로도 활동했다. 생명나누기실천본부 광주·전남 본부장, 사단법인 자비신행회이사장, 한꽃외국인노동자 쉼터 회장 등으로 새터민 복지사업, 다문화가정 껴안기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인도와 티베트에 대한 관심도 크다. 87년 청전 스님과 함께 7개월 정도 인도와 티베트 여행을 했다. 그때 달라이라마를 만났다. 면담 신청을 해서 한 시간 정도 인터뷰를 했다. 미국에서 신학교를 다닌 청전 스님이 통역을 했다. 그 인터뷰를 불일회보에 실었다. 청전 스님은 그후 달라이라마 제자가 되어 23년째 머물고 있다. 그는 “티베트에서의 불교는 종교를 넘어선 삶이었고 행복이었다”며 “현대인의 번뇌를 극복하는 삶의 철학과 혜안을 찾을 수 있는 길이 그곳에 있다”고 말했다.
2001년 티베트박물관을 설립해 티베트 문화를 소개하는 일을 했다. 광주 아시아문화중심도시사업을 지원하는 민간기구인 아시아문화교류재단도 만들었다. 재단의 활동으로 2007년에는 인도박물관을 설립했다.
인도박물관은 재정난으로 지금은 문을 닫았다. 2009년부터는 대원사에 김지장기념관을 만들었다. 신라 출신으로 중국에서 부처로 추앙받는 지장 스님 선양사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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