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자료사진
삽시간에 봄이 쳐들어와서 천지간 꽃불이 났습니다. 꽃에도 순서가 있는 법인데 근래 봄은 우리네 세상사를 닮은 것처럼 참 요망합니다. 남녘부터 동백, 산수유, 매화, 벚꽃 순으로 피어서 북상하는 게 오래 전부터 정해진 순서지요. 그런데 봄꽃이 뒤죽박죽 마구잡이로 피어나는 요즘입니다. 매화, 동백, 산수유, 진달래, 벚꽃, 앵두꽃, 살구꽃이 한꺼번에 꽃대궐 차렸다는 소식 들은지도 오래된 듯합니다.
봄맞으러 남쪽으로 달려가지 않아도 서울, 앉은 자리까지 화신(花信)은 당도했네요. 오직 노거수 동백꽃 못보고 지나가는 봄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서울 도심에서 화분에 심어 피운 동백이 어디 동백꽃이랄 수나 있나요.
남도의 동백꽃은 춘설(春雪)을 맞으며 피어나는 꽃입니다. 그래서 동백은 봄의 최전선이지요. 봄이 와서 동백이 피는 것이 아니라 동백꽃이 피어야 봄은 오는 거지요. 동백은 일찍 피어서 오래 가는 꽃입니다.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 추백(秋栢), 동백(冬栢)으로 구분하기도 한다지만 그냥 동백으로 통일해서 불러도 뭐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동백의 운치를 제대로 느끼려면 오래된 동백나무 군락지의 동백꽃이 백미아니던가요. 남도 해안 동백꽃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피어납니다. 국내 대표적인 남도 섬 동백 군락지는 거제 지심도, 거문도, 여수 오동도, 완도 보길도 세연정이 유명합니다. 동백나무가 원시림 상태로 자라 붉은 꽃을 피우는 게 장관입니다. 전남 강진 백련사, 전북 고창 선운사, 충남 서천 마량포구는 대표적인 내륙의 동백 명소입니다. 세 곳 모두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지요.
동백꽃은 진초록 잎사귀 사이 붉은 피처럼 선명하게 피어납니다. 이미자 절창처럼 ‘그리움에 울다 지쳐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든’ 동백꽃은 그 선명한 색상대비로 한 정염을 보여줍니다.
동백꽃은 군자(君子)의 꽃답게 지는 모습이 강렬하지요. 시들지 않은 붉은 꽃송이가 통째로 바닥에 뚝뚝 떨어집니다. 떠날 때는 미련없이 깔끔하고 쿨하게 가는 겁니다. 어떤 막다른 절벽에서 자살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군더더기 없는 동백꽃을 좋아합니다. 동백숲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붉은색 선연한 채로 길바닥에 산화(散華)한 동백꽃을 봅니다. 그게 낭자한 핏자국 같기도 합니다.
한때 봄소식을 전하러 전국의 동백꽃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때의 기사들을 줄여서 여기 적어봅니다.
■여수 오동도·돌산도
오동도 동백꽃 경향신문
오동도를 중심으로 한려해상국립공원과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 맞닿는 여수는 봄나들이 여정으로 잡기에 맞춤한 곳이다. 맑고 푸른 남해바다에는 오동도, 돌산도, 금오도, 남해도 등 그림 같은 섬들이 떠있다. 오동도는 3만6천여평의 자그마한 섬이지만 동백나무숲이 하늘을 덮고 있는 ‘동백섬’이다.
봄이면 4,000여그루의 동백이 한달 넘게 꽃을 활짝 피운다. 오동도 입구 주차장에서 섬까지 방파제로 연결된다. 방파제와 섬 안의 동백숲 산책로가 일품이다. 2㎞의 산책로를 동백과 해장죽이 장식하고 있다. 매표소와 오동도 사이에 동백열차가 운행되기도 한다. 유람선과 모터보트를 타면 용굴, 병붕바위, 지붕바위 등 해안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돌산읍 금오산 기슭 돌산도 향일암에도 동백이 만개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500년생 동백나무를 볼 수 있다. 향일암은 일출 명소이자 4대 기도도량이기도 하다. 여수에서 배를 타고 2시간30분 가량 나가면 거문도와 백도의 비경을 둘러볼 수 있다.
여수 거문도 동백터널 경향신문
■강진 백련사
‘남도 답사의 1번지’로 불리는 전남 강진. 강진만의 만덕산 자락에 자생하는 동백은 김영랑시인이 노래한 모란과 더불어 ‘강진의 봄’을 상징한다. 만덕산에는 백련사가 들어있다. 신라 문성왕 때(839년) 창건됐고 고려 원묘국사에 의해 80여칸으로 중창됐다. 고려 후기에 8명의 국사를 배출했다. 천태사상에 입각한 결사도량으로 침체된 불교의 중흥을 도모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대웅보전과 만경루의 편액은 조선조 명필인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만덕산은 우리의 차문화가 비롯된 곳으로 ‘다산’으로도 불린다. 정약용은 이 산의 별칭을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동백은 만덕산 자락 약 2만평의 넓이에 3,000여그루가 자란다. 모두 수령이 300년 정도 되는 것들이다.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돼 있다. 다산초당은 18년간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하며 ‘목민심서’ 등 대표적 저서를 지은 곳이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산중 오솔길 양편으로 늙은 동백나무가 늘어서 꽃을 피우고 있다. 다산이 삼간 초막에 머물며 오갔던 길이다.
다산초당 동백숲에 떨어진 백련꽃 경향신문
■고창 선운사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작년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습니다’(미당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
미당의 고향이자 판소리의 고장인 전북 고창은 수많은 고적과 절경을 두루 갖춘 역사의 고장이다. 이 중에서도 선운산에 위치한 선운사는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절이다. 백제 위덕왕 28년(581년) 검단선사가 창건했다. 주변에는 낙조대, 선학암, 봉두암, 도솔계곡 등 빼어난 자연경관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선운사 대웅전 뒤로 길게 우거져 있는 500년생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84호)으로 유명하다. 4월 말까지 꽃을 볼 수 있다. 동백숲은 선운사 뒤쪽 5,000여평에 걸쳐 넓게 자리하고 있다. 가장 큰 나무는 밑부분의 지름이 80㎝에 이른다.
선운사 동백꽃 경향신문
■거제 지심도·외도=한려해상국립공원의 중심에 있는 거제는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특히 봄이면 청정해역과 거제의 명물 해금강이 동백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거제대교를 건너 거제도에 들어서면 도로에 가로수처럼 늘어선 동백이 먼저 눈에 띈다. 장승포에서 20㎞쯤 떨어진 학동마을의 동백숲(천연기념물 제233호)과 거제 남쪽 끝 여차해변의 울창한 동백숲도 화려한 모습을 선보인다.
장승포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지심도에서도 튼실하게 자란 동백나무 군락을 만나게 된다. 몇백년씩 묵은 아름드리 나무에 피어난 꽃들이 섬을 붉게 물들인다. 외도해상관광농원도 들러볼 만하다. 구조라항에서 유람선을 타고 20분이면 닿는다. 섬주인이 40년 동안 정성으로 가꿨다는 곳으로 동백숲 사이로 선샤인, 야자수, 선인장 등 800여종의 아열대 식물이 섬을 뒤덮어 별천지를 보여준다. 은환엽유카리, 스파리티움, 마호니아 등 희귀식물도 눈길을 끈다. 편백나무숲으로 만든 천국의 계단과 정상의 비너스 공원도 이채롭다. 전망대 휴게실에서는 해금강을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 있다.
거제 지심도 동백 사진작가 황헌만
경향신문
■통영 미륵도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통영은 한려수도 300리 물길의 동쪽 끝자락이다. 소설가 박경리, 음악가 윤이상, 시인 유치환·김춘수 등이 나고 자란 도시다. 미륵도는 2개의 다리와 1개의 해저터널로 통영과 연결돼 있는 섬이다. 23㎞의 해안도로인 산양관광도로 드라이브가 백미. 아름다운 해안굴곡과 언덕, 한적한 포구정경 등 다도해의 절경을 만끽할 수 있다. 도로 곳곳에 동백나무들이 빨간 꽃을 피우며 자태를 뽐낸다. 도로 남쪽의 달아공원은 남해의 멋들어진 낙조를 감상하기에 좋다. 용화사와 미래사를 잇는 등산로도 호젓하다.
통영 미륵도 동백꽃 경향신문
■서천 마량포구
서천 마량포구 동백슾 서천군청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는 동백 자생지로는 북방한계선이다. 육지에서 마량리 북쪽으로는 동백을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이곳 마량포구는 서해안에서 몇 안되는 일몰과 일출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명소로도 유명하다. 서천화력발전소 뒤편 마량리 동백정 주변에 한 그루 둘레가 10m는 될 만큼 무성한 수령 500년의 동백나무 100여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돼 있다.
마량리 포구에는 지금 주꾸미가 한창이다. 쪽빛바다를 배경으로 피어난 붉은 동백꽃을 보고 주꾸미를 초고추장에 찍어 소주 한잔 들이켜면 봄나들이가 한결 풍성해진다. 예로부터 ‘봄 주꾸미, 가을 낙지’라고 했으니 지금이 제철이다.
해마다 이곳에서 동백꽃·주꾸미축제가 열리는데 올해는 벌써 축제가 끝났다. 지난달 22일부터 4월4일까지 서천군 서면 마량리 동백나무숲 일원에서 열렸다. 하긴, 축제 때는 인파가 몰려 호젓한 맛이 없으니 여행은 축제 끝난 뒤가 더 좋다.
주꾸미는 낙지과에 속한다. 낙지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더 작고 뭉툭하다. 큰 놈이라고 해봤자 빨판이 달린 다리까지 길게 잡아 늘어뜨려서 30㎝ 정도다. 그러나 쫄깃쫄깃 씹히는 살맛은 낙지만 못할 것이 없다. 대부분 화덕에 굽거나 끓는 물에 데쳐내 통째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소주 안주로 최고다. 볶음, 조림으로 요리하기도 한다. 회, 샤브샤브, 두루치기 등으로도 먹을 수 있다.
마량포구는 서해안의 대표적인 주꾸미 산지다. 오후 2시쯤이면 50여척의 주꾸미 어선들이 시커먼 먹물로 뒤범벅이 된 주꾸미를 가득 싣고 포구로 돌아온다. 축제기간에는 주민들이 주꾸미 요리장터를 마련하고 주꾸미회, 볶음, 무침 등의 요리를 해준다. 축제가 끝났어도 기다란 방파제를 따라 형성된 포구의 횟집과 포장마차촌에서 싱싱한 주꾸미요리를 맛볼 수 있다.
주꾸미를 잡는 방법도 재미있다. 여러개의 커다란 소라껍데기를 그물처럼 줄로 묶어 바다의 바닥에 넣은 뒤 하루 이틀이 지나 다시 끌어올리면 그 속에 주꾸미가 한마리씩 들어있다. 이른 봄철 산란기를 맞은 주꾸미들이 산란을 위해 틈을 찾아 들어가는 습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마량포구는 바다쪽으로 비죽이 나와있는 특이한 지형으로 일몰과 일출을 한 장소에서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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