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악에 대하여/
사진 문화재청
※유네스코는 27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9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이 신청한 농악에 대해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확정했다. 이에 따라 한국은 농악을 포함해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2001), 판소리(2003), 강릉단오제(2005), 강강술래·남사당놀이·영산재·처용무·제주칠머리당영등굿(2009), 가곡·대목장·매사냥(2010), 줄타기·택견·한산모시짜기(2011), 아리랑(2012), 김장문화(2013) 등 17건의 인류무형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농악은 타악기와 관악기, 춤과 연희, 서커스 등과 어우러지는 우리나라 전통의 종합 예술이다. 당신과 농사신을 위한 제사, 액을 막고 복을 기원하는 축원, 마을의 흥겨운 축제 역할도 겸했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는 농악의 영문 등재명은 'Nongak, community band music, dance and rituals in the Republic of Korea'로 했다. 농악이 공동체의 음악이자 춤이고, 공연예술로서뿐 아니라 공동체 의례의 기능까지 수행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한국의 줄다리기와 제주 해녀문화도 내년 11월과 2016년 각각 등재 여부가 결정된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은 ‘농악’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 등재를 축하하는 기념행사를 오는 29일 오후 3시 경복궁 흥례문 앞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이날 행사에는 전국 각 지역을 대표하는 11개 농악단체 400여 명이 참여하여 대규모 축하공연을 펼치는데, 농악의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하늘에 고하고, 천하에 알리는’ 자리로 마련된다. 이번 축하공연은 ▲ 비나리굿 ▲ 흥겨운 농악 한마당(단체별 농악공연) ▲ 삼동골(삼층탑) 쌓기, 12발 상모돌리기 ▲ 대동놀이 순으로 이어진다.
-다음은 지난 10월 31일 농악의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등재가 확실시 됐을 때 '여적'에 썼던 글이다.
[여적]농악
신경림의 첫 시집 <농무>는 1973년 나왔다.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그의 대표작인 ‘농무’는 당대 최고의 농촌시이자 민중시로 꼽힌다.
오늘이 핼러윈데이다. 우리나라에도 미국 행러윈데이 못지 않게 신명나게 즐기면서 귀신 쫓는 풍습이 있었다. 정월 대보름 전야에 당산나무나 서낭당을 시작으로 마을의 큰 골목, 집집의 마당, 곳간, 장독대, 부엌, 측간 앞에서 풍물을 치면서 마당밟기를 해 악귀를 쫓고 풍년을 빌었다. 추석, 백중 등의 절기와 모내기, 김매기, 가을걷이 등 농사일을 할 때도 마당과 들판에 풍물소리가 요란했다. 이처럼 농악은 온 동네 사람들이 참여하는 두레의 굿이자 놀이였다.
농악에는 타악기인 꽹과리·징·장구·북·소고와 관악기인 날라리(호적)·나발이 동원된다. 춤과 노래도 빠지지 않는다. 지역에 따라 풍물·풍장·두레·매구·매굿 등 부르는 이름도 다양했다. 1960년대까지는 농촌 마을마다 농악의 전통이 살아 있었다. 걸립패나 남사당패처럼 전문적인 유랑집단도 전국을 떠돌면서 세련된 기예를 펼쳤다. 열두 발 상모를 휘휘 돌리고 장구를 치며 몸을 팽이처럼 돌릴 때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이 나라에 불어닥친 산업화 바람은 농촌의 흥과 함께 농악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농악이 변형된 형태로 되살아난 게 ‘사물놀이’다. 사물놀이는 1970년대 말 남사당의 후예인 김덕수, 김용배, 이광수, 최종실, 이종대, 최태현 등이 시작했다. 징, 꽹과리, 북, 장구 네 가지 타악기로 들판이 아닌 실내에서 연주해 큰 인기를 얻었다. 마을의 장구재비인 아버지에게 흥을 배웠다는 소리꾼 장사익도 한때 사물놀이패에서 활동했다.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도 ‘농활’과 시위현장에서 농악을 펼쳤다. 88서울올림픽 때 마스코트 호돌이는 농악놀이에서 상모를 돌리는 모습으로 서울의 ‘S’자를 표현했다. 농악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될 것이 확실해졌다고 한다. 우리 농촌에도 ‘농자천하지대본’의 깃발을 휘날리는 농악대의 흥과 신명이 되살아났으면 좋겠다.
사진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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