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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공개된 지석(誌石) 비밀창고와 도굴꾼의 세계

by 김석종 2014. 10. 2.

 [여적]지석(誌石) 도굴

 

 

                                                                              경찰이 압수한 도굴품 지석/서울지방경찰청 제공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웅진 백제시대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7기의 무덤 중 6기는 일제강점기에 몽땅 도굴됐다. 특히 6호분은 1930년대 공주고보의 일본인 교사 가루베 지온이 백제 연구란 명목으로 도굴했다. 그는 낮에는 ‘선생’이고, 밤에는 무덤을 파헤치는 ‘도굴범’이었다. 해방이 되자 카루베는 이 유물들을 트럭에 싣고 대구로 가서 조선 문화재를 헐값에 사들이고 있던 오구라 다케노스케와 함께 배에 싣고 일본으로 가져갔다. 6호분에서 무엇이 나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근 국립공주박물관이 그의 유족들에게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자 달랑 백제 기와 4점을 보내왔다고 한다.

   이밖에도 일제시대 일본인들은 돈으로 조선인을 고용해 도굴기술을 가르쳤다. 이들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초기까지의 고분을 마구 피헤쳤다. 1910년 개성과 강화도의 고려 고분 도굴사건, 1920년대 대동강의 낙랑고분 도굴사건, 경상도의 신라 가야고분 도굴사건이 대표적이다. 일본인들은 도굴을 통해 국보·보물급의 귀한 문화재를 줄줄이 훔쳐갔다.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 가운데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무덤이다. 무령왕릉은 백제가 멸망한 지 천 년이 훨씬 지난 1971년 여름 온전한 상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서도 무령왕릉 지석(국보 제163호)은 삼국시대의 가장 중요한 유물로 꼽힌다. 지석에는 무덤 주인공이 523년과 525년에 각각 세상을 뜬 백제 무령왕 부부라는 것, 지신들에게 돈을 주고 무덤 터를 샀다는 것(매지권·買地卷) 등 백제의 역사·풍습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가 가득 담겨 있었다. 백제사 연구의 오류를 수정하는 결정적 자료가 됐다. 

 국내인들의 도굴은 1960년대 이후 성행했다. 지금까지 국내 주요 무덤과 탑의 90% 이상이 도굴됐다는 게 정설이다. 1966년 도굴꾼들이 불국사 석가탑 안에 봉안된 유물을 노리다 탑의 지붕돌을 떨어뜨렸다. 문화재당국은 서둘러 해체보수작업을 벌였는데 이때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됐다.

 문화재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에서 도굴꾼들이 학자보다 한 수 위라는 말이 있다. 역사와 풍수지리, 유물 감정 등에 해박한 데다 땅속 유물이 있는 곳도 귀신같이 알아낸다. 과거에는 철사로 된 꽂을대로 땅속을 쑤셨지만 최근에는 디지털 탐지기까지 동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땅위를 훑기만 해도 디지털 모니터를 통해 매장된 유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후 처리가 깔끔해 관리인조차 도굴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도굴꾼이 중간 매매업자(나카마)에게 팔아넘긴 ‘물건’은 몇 단계 세탁과정을 거쳐 소위 ‘윗선’에게 전달된다.이때 오른손으로 물건을 주면 왼손으로 현금을 받는 게 원칙이라고 한다. 윗선은 비밀장소에 유물을 숨겨두고 공소시효가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싼 값에 고미술 시장에서 유통시킨다.

 한동안 뜸했던 도굴 사건이 또 터졌다. 이번에는 조선시대 지석(誌石) 558점을 개인 수장고에 보관해온 사립박물관장이 경찰에 적발됐다고 한다. 지석은 무령왕릉 지석처럼 무덤 앞이나 옆에 판석이다. 대체로 무덤 주인의 본관과 이름, 조상의 계보, 생일과 죽은 날, 평생의 행적, 가족관계, 무덤의 소재와 방향 등이 기록한다. 지석에 실리는 글은 크게 묘지(墓誌)와 묘명으로 구분된다. 묘지는 전기(傳記)와 같이 사실만을 적은 산문을 말하며, 묘명이란 적혀진 사실에 대해 논의를 덧붙여 시로 읊은 운문을 말한다. 따라서 지석에 실린 글 가운데 이 두 가지의 내용이 함께 있을 때에는 묘지명이라고 부르며, 또 그 앞에 서문이 있을 때에는 묘지명병서(墓誌銘竝序)라고 부른다.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지석 가운데 가장 오랜 것으로는 고구려의 동수묘지(冬壽墓誌, 357),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5세기 중엽) 등을 들 수 있다.

 이번 지석 도굴꾼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에 걸쳐 살았던 권문세족의 무덤 90여기를 파헤쳐 지석을 꺼낸 것으로 전해진다. 대체로 문화재적 가치가 뛰어난 ‘조선의 타임캡슐’이다. 도굴꾼의 윗선이라고 할 수 있는 박물관장은 10년 가까이 비밀창고에 지석을 보관하고 공소시효가 끝나길 기다리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에게 지석을 판 3명의 매매업자는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한다. 후손들은 뒤늦게 조상의 묘가 도굴된 사실을 알고 허탈해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문화재 관리 정책보다 도굴꾼이 한 수 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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