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통죄 폐지에 대한 유림의 특별한 호소
“언제부터 대한민국 검사들이 내 아랫도리를 관리해 온 거니?”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간통죄로 고소당한 주인공 호정(강수연)이 분통을 터뜨리며 하는 말이다. “난 프랑스로 뜰 꺼야. 이건 도피가 아니라 정치적 망명이야!” 이번에 국가가 개인의 ‘아랫도리’를 간섭할 수 없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간통죄는 성적 자기결정권과 행복추구권에 어긋나고,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법적 권리가 향상돼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받아들여진 결과다. 이로써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에게 ‘주홍글씨’의 낙인을 찍어온 간통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 장면
간통죄의 역사는 일부일처제와 궤를 같이한다. 문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처벌이 여성에게만 엄격했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로마, 인도 등과 함께 여성의 간통에 매우 엄했다. 로마는 유부녀가 바람을 피우면 재산을 몽땅 빼앗고 추방시켰다. 카스트라는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인도도 계급이 남자와 간통한 여자를 화형에 처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부터 간통에 대한 처벌 기록이 나온다. <삼국지> 동이전에 ‘남녀가 음란하면 모두 죽였으며, 투기하는 여자를 더욱 미워하여 죽인 뒤 나라의 남쪽 산위에 버려 두어 썩게 했다. 백제는 간통한 여성을 노비로 삼았으며, 고려시대에는 아내가 간통한 경우 남편은 상대 남자를 죽이고 처를 내쫓을 수 있었다.
고려·조선 시대 ‘자녀안(姿女案)’은 방자한 여자(자녀), 즉 음란하고 방탕한 여인의 행실을 관리한 기록물이다. 양반가문의 여자가 간통을 저질러 자녀안에 오르면 당사자는 종으로 신분을 낮췄다. 가문의 불명예는 물론 자손들의 과거·승진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시대 법률(대명률)로도 간통을 규제했다. 하지만 남성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에 그쳤다. 세종 때 이귀산의 아내 유씨는 어릴 적 부터 사통해온 먼 친척인 조서로와 혼인 후에도 남편 몰래 간통을 한 죄로 3일 동안 ‘자녀(姿女)’라는 표찰을 달고 저자에 세웠다가 목을 벴다. 조서로는 개국공신의 적손이라는 이유로 귀양의 경미한 처벌을 받았다.
세종 때 감동은 평양현감을 지낸 최중기의 아내로 무려 39명과 간통 행각을 벌여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녀가 사통한 인물 중에는 사헌부 지평, 고을의 수령, 공조판서를 비롯한 공신의 자제 등 각계의 지도층 인사들이 골고루 포함되어 있었다. 감동이 사대부의 부녀자였기 때문에 대명률로는 그녀와 관계를 맺은 남성들은 모두 사형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남성들은 장형 또는 파직의 형벌을 받는 데 그쳤다. 감동이 음녀(淫女)이기 때문에 간통한 남자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판결 덕분이었다.
성종 때 어우동도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승문원 지사 박윤창의 딸인 어우동은 종실 태강수(泰江守) 이동과 혼인하였으나 천한 신분의 남자를 끌어들여 문란한 성관계를 맺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 이동에게 소박맞은 뒤 오히려 수십 명의 조관 및 유생들과 난잡한 관계를 가졌다. 역시 종실인 서산군 오종년과도 통정했다. 어우동은 의금부에 잡혀가 풍기문란으로 문초를 받고 관계를 맺은 남자들을 모두 고하였지만 사대부 고관인 남자들은 대부분 훈방조치됐다. 어우동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문란하게 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당시 스캔들의 소상한 내용이 <용재총화>, <성종실록> 등에 전해진다.
신윤복 그림 <이부탐춘>, 과부가 봄빛을 탐하다
성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녀안을 더욱 확대해 재가까지도 음행으로 단정하게 된다. 이는 가문의 흥망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남편이나 아들이 간통 남녀를 죽이거나 자살을 강요하는 등 자체 처벌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선조 때 진주의 하세헌은 과부인 자기 어머니가 종과 간음을 하자 그것이 알려지기 전에 울면서 자기 어머니를 타살하였다. 정조 때 이언은 조카 며느리 구씨가 과부로서 음행했다는 소문을 듣자 허실도 가리기 전에 그의 친척, 그리고 구씨의 친오빠 되는 구성대와 합세하여 몸에 돌을 묶은 다음 물에 떠밀어 죽였다. ‘자녀목’ ‘자녀암’ ‘자녀소’ ‘자녀굴’ 등이 간통이나 간통혐의로 자살하거나 타살된 곳에 붙은 이름이다.
반면 양반 남성들은 축첩, 노비에 대한 간통(성폭행) 등 성적으로 많은 특혜를 누렸다. 여성 노비는 기혼과 미혼을 가리지 않고 무시로 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편과 사별한 후 평생 수절한 여자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열녀문(烈女門)을 세우면서 ‘일부종사(一夫從事)’를 강요했다.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열녀문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것을 생열녀문(生烈女門)이라 했다. 여자들의 투기를 죄악(칠거지악) 중의 하나로 삼아 막았고, 정실과 첩들 간의 화목을 덕으로 삼았다.
이런 차별적인 남성 중심의 성문화가 전기를 맞은 것은 개화기다. 1889년 3월 덕수궁 앞에 50여명의 여인네들이 모였다. 여인들은 ‘한 지아비가 두 아내를 거느리는 것은 윤리를 거스르는 일이며, 덕의를 잃는 행위(一夫二失 悖倫之道 德義之失)’란 글을 내걸고 축첩 반대 시위를 벌였다. 고종에게도 후궁을 물리쳐 모범을 보일 것을 요구했다. 국내 최초의 여권운동이 된 이 시위는 1894년 갑오개혁에 이어 1905년 고종 황제의 간통죄 공표를 이끌어냈다고 한다.
간통죄 폐지로 간통이 허용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혼인의 성실의무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륜으로 인한 가정파탄이 늘어날까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간통죄의 폐지를 마치 간통 자체의 허용이나 묵인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다. 간통죄가 폐지되면서 모텔·여관 등 숙박업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돈다. 실제로 콘돔 제조사와 사후피임약 제조업체의 주가가 올랐다고 한다. 심지어 나이트클럽의 중년남녀들이 간통죄 폐지 축배를 들었다는 보도까지 나오는 게 최근의 세태다.
이런 때 눈길을 끄는 게 유림(儒林)의 반응이다. 유림을 대표하는 성균관은 그제 발표한 간통죄 폐지 공식입장에서 “간통은 법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도 금기시되어왔던 행위이며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용인될 수 있는 행위가 아닌 부도덕한 행위”라며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법으로 정해놓고 그렇게라도 지키라고 했는데 이제는 법의 테두리마저도 없어졌다”고 우려했다.
성균관은 또 “간통이라는 행위는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행위”라면서 “이제 법만 피하면 부끄러워하지 않던 시대에서 피할 법이 없는 ‘인륜의 강상(綱常) 도리’를 한시도 잊을 수 없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강상은 유교의 삼강과 오상(오륜), 사람이 늘 지키고 행해야 할 덕목을 뜻한다. 유교 사회에서는 삼강오상에 어긋난 행위를 한 사람을 강상죄인(綱常罪人)이라 했다.
간통은 법령 이전에 인륜도덕의 문제임은 분명하다. “간통죄 폐지는 어쩌면 더 강력한 법인 도덕을 우리 가슴 깊이 새겨넣는 것과도 같다.” 고루하게 여겼던 유림의 호소가 이 시대 성윤리의 가르침으로 너무나 생생하고 절실하다. 이제는 불륜으로 인한 ‘가정 해체’ 문제를 법이 아닌 가정의 진정한 의미와 올바른 애정관, 부부간의 신뢰, 책임에 대한 ‘도덕’을 가슴깊이 새겨넣는 것이 중요해졌다.
다음은 이번에 성균관이 인용한 ‘공자님 말씀’이다. “형벌로서 백성을 다스리려고 하면, 백성들은 형벌을 모면하려고만하지 부끄러워함은 없다. 그러나 덕으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예로서 백성을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은 부끄러워 할 뿐 아니라 또한 스스로를 바로 잡는다(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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