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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종의 문화판

한바탕 대국민 사기극? 차라리 숭례문을 다시 짓자

by 김석종 2014. 1. 15.

 

한바탕 대국민 사기극? 차라리 숭례문을 다시 짓자 

 

이쯤 되면 차라리 불 탄 채로 그냥 놔두는 게 나을 뻔 했다. 국보 제1호 숭례문이 해를 넘겨서도 바람 잘 날 없다. 얼마 전에는 대목장이 숭례문 기둥에 써야할 금강송을 어딘가로 빼돌리고 값싼 러시아산 소나무를 썼다는 의혹이 터졌다.

 

경찰이 수사에 나서고 문화재청도 기둥 표본을 채취해 연구소에 맡기는 걸 보면 뭔가 단단히 꼬투리를 잡은 모양이다. 숭례문 복원을 총지휘한 신응수 대목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펄쩍 뛴다.

 

 

 

 

황장목, 춘양목으로도 불리는 금강송은 살아 1000, 죽어 1000이라는 칭송을 듣는 우리 소나무다. 민족 정체성과 역사성을 논하기도 한다. 갔다 온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겨울 금강산에 쭉쭉 뻗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에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이제는 기둥, , 추녀에 사용할 국산 소나무를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한다. 금강송 귀한 건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고종 2(1865) 경복궁을 중수할 때도 소나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큰 나무들을 양반들의 묘지 주변에서 강제로 베어다 사용하는 바람에 원성과 비난이 빗발쳤다.

 

여기에 원납전 발행에 따른 경제 파탄, 경복궁 중건에 강제로 동원돼 힘든 일을 해야 하는 백성들의 원성이 보태져 대원군 인기는 곤두박칠쳤다. 따지고 보면 숭례문 복원이 부실 투성이가 된 것도 이명박 대통령 임기 안에 공사를 마치려고 서두른 탓이 크다. ‘문화재 정치학의 그림자가 꽤나 길고 질기다.

 

의혹의 당사자가 신응수 대목장인 건 더 큰 충격이다. 그는 숭례문에 진 빚이 작지 않다. 그가 목수의 길에 들어선 게 1962년 숭례문 복원공사였다. 거기서 대원군 시절, 경복궁 중수를 지휘한 궁궐 도편수의 전설최원식의 직계 제자인 조원재 도편수와 이광규 부편수를 만났다. 그렇게 홍편수-최원식-조원재-이광규로 전해진다는 조선 목수의 계보를 제대로 이었다.

 

그 후로 국내 최고의 한옥 건물을 얼추 다 그가 도맡다시피 했다. 꼬박 20년 동안 경복궁을 새로 지었고, 광화문까지 고쳐 지은 건 널리 알려진 바다. 그가 우리 시대 마지막 도편수’, ‘당대 최고의 목수로 인정받는 이유다.

 

그런 신 대목장의 눈앞에서 숭례문이 불타 버렸다. 당연히 숭례문 복원은 그에게 맡겨졌다. 이쯤 되면 신 대목장은 숭례문과 운명적으로 맺어진 사이라고 해야 옳다. 스스로 일생일대의 작업이라고 비장하게 고백하지 않았나.

 

몇 년 전, 좋은 목재를 고르는 게 대목장의 첫 번 째 소임이라고 힘차게 말하는 걸 내가 직접 들었다. 뿜어내는 내공과 자부심이 만만치 않았다. 좋은 나무를 만나야 좋은 목수가 된다고, 좋은 재목을 찾아 평생 백두대간을 헤맸다고도 했던 그다.

 

그예 숭례문 덕에 기둥, 대들보감으로 평생 두 번 만나기 어려운, 수령(樹齡) 80~250, 지름 50~95나 되는 극최상품 금강송을 직접 베어내고 다듬는 행운까지 맞았다. 이 소나무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가 묻힌 삼척 준경묘에서 벌채했다. 전주 이씨 문중과 삼척시가 만만치 않은 반대 속에서도 숭례문 복원의 민족 사업을 외면하지 않고 기증한 거였다.

 

역사에 남을 명작 숭례문을 세우겠다던 신응수 대목장이 보물과 진배없는 명품 금강송 기둥을 바꿔치기 했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숭례문 복원은 그야말로 부실 종합 세트의 끝장이자 한바탕 대국민 사기극이 될 판이다. 국새 사기쯤은 새 발의 피라고 할 핵폭탄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정해준 공사기간으로는 준경묘 황장목을 제대로 말릴 수가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며칠 전 만난 한 비주류문화재 전문가는 이런 사정 때문에 이번 조사도 흐지부지 끝날 거라고 비웃었다).

 

설혹 그런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신 대목장의 잘못이 감해지는 건 결코 아니다. 목조 건축 현장에서는 도편수의 말이 곧 법이라고 큰소리치던 그 기세대로 정부와 맞서 싸워야 했다. 어쩌면 이게 다 문화재를 정치로 엿 바꿔 먹은 결과다. 저 유구한 똥고집 장인 기질을 허접쓰레기처럼 내다버린 탓이다.

 

이래저래 숭례문과 나라꼴이 영 민망하고 볼썽사납게 됐다. 그나마 숭례문 덕에 정책결정, 장인선정, 발주, 시공 과정에 드리운 문화재계 복마전 실상은 싹 다 드러났다. 이참에 문화재 마피아들을 금강송 뿌리 뽑듯이 싸그리 뽑아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번에 '천천히'라는 값진 교훈을 얻었다.

 

언젠가 건축가들과의 술자리에서 들은 얘기다. 일본은 이세 신궁을 고쳐지을 때 동쪽에서 자란 나무는 동쪽 기둥으로, 서쪽에서 자란 나무는 서쪽의 건축에 쓸 정도로 세심하게 신경 쓴다고 한다.

 

이런 정성으로 차라리 숭례문을 다시 짓자. 물정 모르는 소리, 과격한 주장이라고 탓할 것 없다. 허물고 다시 짓는 과정에서 문화재 복원·복구 전반의 문제점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샅샅이 살피고 뜯어고칠 수 있다.

 

10년, 20년이 걸려서라도 1000년 뒤에도 흠결 하나 찾을 수 없는 우리시대의 기념물로 멋들어진 숭례문을 다시 세운다면 그야말로 한참 남는 장사다. 그게 우리가 태워먹고 우리가 잘못 세운 만신창이 숭례문을 다시 세우는 핵심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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