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뜬금없이 되살아난 ‘삐라의 추억’
중부전선에서 군대생활을 할 때다. 1981년 소설가 한수산이 산군부에 의해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해 폐인이 됐다는 북한 삐라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한수산 필화사건은 군사정권이 끝난 이후 사실로 밝혀졌다.
“공중에는 각양각색의 삐라가 휘날렸고 전 군중은 공원에서 나와 시가행진을 했다. 우뢰 같은 만세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삐라를 날리며 행진하였다.” 재독 작가 이미륵(1899~1950)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에 나오는 파고다공원 3·1운동 경험담이다.
한 세대를 건너뛰어 구효서의 <라디오 라디오>는 작가가 10대 초반까지 살았던 강화도 휴전선 접경지대의 1960년대 풍경을 그린 소설이다. 라디오를 켜면 대남 평양방송이 울려나오고 점심 무렵이면 삐라를 가득 실은 기구가 날아온다. 야산을 이불처럼 덮던 삐라, 그 삐라를 공책이나 연필 따위와 바꿔주는 파출소, 이북방송을 들은 죄로 끌려가 조사 받는 아버지…. 그 시절에는 북한에서 날아온 ‘불온삐라’를 전국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삐라를 주워가면 학교에서 상품을 주기도 했다. 몰래 삐라를 갖고 있다가 걸려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삐라 살포는 일종의 심리전이다. 체제선전이나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 적진에 살포한다. <사기>에서 유방과 항우의 마지막 대결의 심리전 무기는 노래였다. 초나라 항우의 군대가 한나라 유방의 병사들에게 포위됐다. 사방에서 난데없이 초나라 노래가 들려왔다. 초나라 병사들은 향수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도망자가 속출했다. 유방의 참모 장량의 심리 작전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곤란한 지경에 삐져 옴짝달싹할 수 없다는 뜻의 ‘사면초가(四面楚歌)’ 고사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결국 항우는 이 전쟁에서 죽음을 맞았고, 이 전쟁은 경극 ‘패왕별희’의 소재가 됐다.
세계 최초의 삐라는 도망간 노예를 찾는 고대 이집트의 전단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오늘날로 치면 현상 수배 전단인 셈이다. 이 파피루스 전단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16세기 독일에서는 위선적인 교황을 풍자하는 그림 전단이 곳곳에 뿌려졌다.
서구 민주주의 혁명과 공산주의 혁명 과정에서 정치세력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널리 알리기 위해 삐라를 활용했다. 세계최초의 항공기 하이잭킹은 1931년 페루 남부 아레키파에서 일어난 항공기 납치사건이다. 페루의 무장혁명조직이 팬아메리칸 항공(PA) 우편물 수송기를 납치했다. 무장혁명조직의 ‘선전삐라’를 수도 리마 상공에 뿌리기 위한 납치극이었다고 한다.
독재정권 치하에서 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몰래 퍼뜨리는 전단도 삐라에 해당한다. 가령, 1940년대 초 나치스시대의 독일에서 뮌헨의 대학생들이 야간에 벽보로 붙이거나 우송했던 문건들이 그러하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방직후의 혼란기에 좌우익의 정치세력들이 삐라를 많이 활용했다. 당시의 사정을 담은 <‘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라는 책도 나와 있다.
삐라는 전쟁 시기에 가장 많이 뿌려졌다. 2차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심리전 부대장 매클루어는 1개 비행대대를 동원해 항복 요령을 담은 삐라를 뿌렸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4~1945년 무렵에는 미군 전투기가 일본 주요도시와 일본군 진지에 삐라를 대량으로 뿌렸다. 폭격할 도시를 미리 알려줘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일본군이 이기는 줄로만 알고 있던 주민들에겐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일본군에게는 투항을 호소하면서 전의를 상실케하는 심리적인 효과를 거뒀다.
당시 미군은 폭격기의 뒷쪽 문을 열고 몸을 밖으로 내민 채 삐라를 투하했다. 일본인들은 전단지를 뜻하는 영어 빌(bill)을 ‘비라’라고 읽었다고 한다. 삐라는 이를 우리가 경음화해 받아들인, 좀 이상한 외래어다. 종이의 한쪽 면을 가리키는 히라(片) 또는 의성어로 비라비라(팔랑팔랑)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전한다. 전단(傳單)이 바른 말이지만 그렇게 하면 왠지 하늘에서 날아오는 얇은 종이에 살벌한 내용이 담긴 그 느낌이 살지 않는다. 이렇게 들어온 또다른 일본식 영어로 찌라시가 있다.
한반도에는 한국전쟁 당시 남북이 똑같이 엄청나게 많은 양의 삐라를 살포했다. 주로 상대편의 귀순이나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삐라를 지니고 항복하면 목숨을 보장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특히 유엔군 총사령관 매튜 리지웨이와 미 육군장관 프랭크 페이스는 삐라의 대량살포를 강하게 지시했다. “적을 종이(삐라)로 묻어라.” 미군은 당시 한반도에 무려 40억 장의 삐라를 뿌렸다고 한다. 북한이나 중공군 포로들이 항복한 이유의 33%가 삐라를 포함한 심리전의 영향으로 나타났다.(이임하의 책 <적을 삐라로 묻어라>)
경향신문 사진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경고하는 한국군 삐라
전쟁 직후에는 지리산 등지의 빨치산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삐라를 뿌렸다. 종전 후에도 남북 간에 경쟁적으로 삐라 살포전을 진행했다. 이때부터 주로 기구나 풍선을 쓰게 됐다. 이 시기 삐라를 ‘냉전시대의 종이폭탄’이라고 불렀다. 5월의 광주에도 삐라는 빠지지 않았다. 정부는 ‘폭도들’을 비난하는 삐라를 헬리콥터로 뿌렸고, 시민군은 실제상황을 알리는 유인물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민주화운동의 현장에도 삐라는 뿌려졌다. 대학생과 문인들이 만든 삐라에는 명문장이 많았다. 문학평론가 김도연은 수기·르포·일기는 물론이고 삐라·성명서·호소문까지 ‘전단문학’의 이름으로 끌어안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상이 바뀌어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삐라는 점차 사라졌다. 남북간에도 2004년 남북회담에서 상호 비방을 중지하기로 하면서 삐라는 아예 박물관으로 들어간 듯 보였다. 강원도 고성과 정선에는 추억의 삐라를 전시하는 박물관까지 들어섰다. 그런데 요즘 복고와 향수가 대세라더니, 케케묵은 ‘삐라’까지 새삼 뉴스의 중심이 되고 있다. 남쪽 우익 민간단체들의 대북 삐라 살포가 결국 남북 간 총격전으로까지 이어진 상황이다.
2차대전 초기 독일에 침투해 삐라를 뿌리는 임무를 맡았던 영국군 비행사들은 아무런 성과도 없는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우리는 휴지 배달부”라고 자조했다고 한다. "지나가는 게슈타포의 머리 위에나 떨어져라" 하면서 삐라 뭉치의 끈을 풀지도 않은 채 투하하기도 했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면서 별다른 효과를 볼 것 같지도 않은 삐라, 이제는 좀 자제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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