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종 기자 sjkim@kyunghyang.com
ㆍ“고려대장경은 역사·설화·사전 등 포함된 당대의 ‘포털사이트’”
해인사 장경각을 찾은 아주머니가 법정 스님에게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방금 보고 오지 않았느냐”고 하니 “아! 그 빨래판같이 생긴 거요?”라고 대꾸했다. 법정 스님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한문 경전의 한글 번역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웃집 할배 같은 ‘무구한’ 미소가 매력인 종림 스님은 고려대장경 천 년을 앞두고
“과거의 유산은 새로운 문화 창조에 바탕이 될 때만 살아있는 문화재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 김창길 기자
그 ‘빨래판 같은’ 대장경 목판에 생명을 불어넣는 이가 있다.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종림 스님(66)이다.
그는 20년 가까이 팔만대장경 전산화, 초조대장경 데이터베이스 구축, 인터넷을 통한 세계 통합 대장경 작업에 몰두해왔다. 경향신문이 종림 스님을 만나는 까닭은 또 있다. 내년이 고려대장경 조성 천 년을 맞는 해이고, 그가 이 뜻깊은 ‘대장경 밀레니엄’ 사업의 중심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23일 서울 안암동 보타사 대원암 경내 중앙승가대학 건물 4층 고려대장경연구소 사무실에서 종림 스님을 만났다. 대원암은 근대불교의 대석학인 석전(박한영) 스님과 탄허 스님이 불경 번역사업을 하던 곳이다. 그곳에서 불경 전산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 고려대장경 천 년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초조대장경에 이어 교장(속장경)을 완성한 대각국사 의천은 대장경의 편찬을 ‘천 년의 지혜를 정리해 천 년의 미래로 전해주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내년은 고려인에게 미래였던 과거의 천 년이 끝나고 새로운 미래의 천 년이 시작되는 해입니다.
2000년 밀레니엄의 초반에 고려대장경 밀레니엄과 만나게 된 것도 특별하지요. 의천이 썼던 ‘천 년의 지혜를 천 년의 미래로’는 고려대장경 천년맞이 슬로건이기도 합니다.”
- 팔만대장경은 알아도 초조대장경과 교장은 일반인들에겐 좀 생소합니다.
“목판이나 완질 인쇄본이 없기 때문입니다. 초조대장경 인본(印本)의 존재가 알려진 것도 최근의 일입니다. 현재 일본 교토의 남선사(난젠지·南禪寺)에 1800여권, 국내 사찰·박물관·도서관 등에 300여권, 일본 쓰시마 역사민속자료관에 600여권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남선사는 그동안 일본 학자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을 만큼 초조본 대장경을 애지중지했습니다. 오랜 설득 끝에 남선사의 협조로 초조대장경 조사와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끝내고 복원간행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고려대장경연구소는 7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려판 초조본 대장경 조사완료 보고회’와 ‘한·일 공동 초조대장경 복원간행 위원회’ 발족식을 가졌다)
- 고려대장경이 세계 문화유산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 점은 무엇입니까.
“고려대장경은 인쇄술을 비롯한 하드웨어와 서지, 편집 등에서 세계 최고의 지식문화 수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불교 경전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 역사, 설화, 사전 등이 모두 포함돼 있는 당대의 ‘포털사이트’이기도 하지요. 고려대장경은 서지학적 중요성 외에 문화 콘텐츠의 ‘보물창고’라 할 만합니다. 그만큼 학술적으로 중요하고 오늘날에도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치가 충분합니다.”
- 이미 모든 경전이 한글로 번역·출판돼 있는데 고려대장경 데이터베이스가 왜 필요한가요.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대장경 원본을 쉽게 볼 수 있게 하는 수단입니다. 불교문화유산이 더 이상 훼손되거나 사라지기 전에 정밀 찰영하고, 디지털정보로 보존해 사이버상에서 영원히 볼 수 있게 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특히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대장경 초조본을 사이버상에서 집성하는 일은 대장경 역사의 공백을 채우는 일입니다. 우리 민족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과 최고의 목판인쇄본을 보유하긴 했지만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처럼 르네상스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 정보화 시대에는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군요.
“우리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또 다른 매체혁명을 접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현재 우리가 대장경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가장 앞서나가고 있습니다. 기존 인쇄매체에서 디지털매체 시대로 전환하는 기회를 선점한 겁니다.
서구에서도 불교철학이 대안 사상으로 주목받고 있는 만큼 고려대장경을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자원으로 부각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 내년이 대장경 조성 천 년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됐나요.
“연구소에서 초조대장경 자료를 정리하면서 2011년이 천 년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모두들 흥분했습니다.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니라 문화강국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천년맞이 행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루이스 랭카스터 미 버클리대 명예교수가 나와 함께 고려대장경 천 년의 해 기념사업 준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습니다. 2007년 4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고려대장경 천 년의 해’ 선언식을 가졌습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초조대장경의 첫 판각지이자 보관장소가 대구 팔공산 부인사입니다. 우리 연구소는 대구시와 함께 천년맞이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연구소는 초조대장경 복원출간 사업, 통합대장경 네트워크 결성, 대장경 국제학술대회, 실크로드 아시아 지식·문화 교류전, 초조대장경 문화상품 개발 등을 준비 중입니다. 대구시는 팔공산 동화사 통일대불 주변에 경판체험관을 조성하고, 국립천년대장경문화관을 건립해 디지털 장경각을 설치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 고려대장경 천 년은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왜 따로 행사를 합니까.
“그것이 좀 아쉽습니다. 해인사에는 대장경 목판의 실물이 있고, 고려대장경연구소에는 대장경 연구자료 등 소프트웨어가 있습니다. 지자체 간의 협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대장경 문화사업으로 계속 이어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쯤만 말씀드리지요.”
- 초조대장경 복원 출간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초조대장경을 최대한 원본에 가깝게 다시 제작하게 됩니다. 대장경을 간행하는 것과 마찬가지 작업입니다. 팔만대장경이 어떤 과정을 통해 조성되고 유통되었는지는 아직도 비밀에 싸여 있습니다. 초조본의 복원은 팔만대장경에 대한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마지막 연결고리입니다.”
- 통합대장경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고려대장경을 중심으로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티베트어, 한문 등으로 기록된 모든 전통적인 대장경과 한글 대장경, 일본어 대장경, 영역 불전(佛典) 등 다양한 언어로 쓰여진 불전들을 통합해 전산화하고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달리 만들어진 경전이 디지털 세계에서 국제적인 통합시스템과 글로벌 콘텐츠로 거듭나는 것이지요.
중국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필사본, 지리산 화엄사에 1만3000여 파편 조각으로만 남아 있는 신라 화엄석경도 탁본 등을 연구·조사해 통합대장경에 포함됩니다. 그렇게 되면 필사본에서 목판본, 활자본으로 넘어오는 과정도 밝혀질 것입니다. 디지털 다언어 통합대장경 완성은 불전 전산화의 마지막 작업이 될 것입니다.”
종림 스님은 “석가모니 입멸 후 인도에서는 불전을 올바로 평가하고 편찬하기 위한 4차례의 결집이 있었다”며 “세계의 모든 불전을 통합하는 작업은 ‘21세기 디지털 결집’이라고 할 만하다”고 말했다.
-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아날로그적인 종교로 느껴지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불교의 가르침인 연기(緣起)적 세계관,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연결망을 뜻하는 인드라망 사상은 인터넷 논리 구조와 아주 많이 닮아 있어요. 또 스님들의 수행방법도 바뀌는 세상과 삶의 패러다임에 맞춰 변해야 합니다.”
- 스님은 컴퓨터와 인터넷을 활용하는 데 능숙하십니까.
“사실은 기본적인 작업을 빼고는 컴맹에 가까워요. 나는 큰 방향과 그림만 그리고 연구원들이 작업을 하지요. 허허.”
종림 스님은 불교계에서도 틀에 얽매이지 않는 스님으로 유명하다. 자리를 가리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거리낌 없이 술을 마신다. 독서광으로 문사철(文史哲)에 해박하면서도 방학기, 이두호, 임창, 허영만, 박봉성, 이현세 등 만화가의 작품 계보를 줄줄이 꿸 정도로 만화를 즐겨 본다.
그에게는 따르는 사람이 아주 많다. 언제나 스님들은 물론, 학계·문화계 등 각계각층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특히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스님들의 ‘대장’이기도 하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더할 수 없이 선하게 웃는, 이웃집 할배 같은 ‘무구한’ 미소가 종림 스님의 매력이라고 평한다.
그는 대학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뒤 해인사에서 늦깎이로 출가했다. 해인사 시절의 일화도 남다르다. ‘운수단(雲水壇)’이라고 써붙인 봉고차에 책과 바리때(버너와 코펠)를 싣고 물처럼 구름처럼 산과 바다를 떠돌아다녔다.
80년대에는 해인사 소식지 <해인>의 편집장을 맡았다. 이 사보(寺報)는 스님들의 맑은 글과 멋스러운 편집 디자인으로 절 밖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해인강원 출신의 스님들이 기자, 혹은 필자로 참여했다. 원택·향적·여연·원철·성전 스님 등 해인 출신 문필가들은 지금도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는 “그때 참 재미있게 살았다”고 했다.
- 그런 재미와 자유를 버리고 어떻게 불교 전산화를 시작하게 됐나요.
“컴퓨터와 인연을 맺은 것도 책 때문이었어요, 80년대 중반 해인사 도서관장을 할 때 칼 세이건의 <에덴의 용>을 읽었습니다. 아메바에서 지능이 발달한 인간이 컴퓨터를 발명하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한 책입니다. 컴퓨터가 세상을 바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전산학원에 등록해 컴퓨터를 배웠습니다.”
- 그때는 컴퓨터가 형편 없었겠네요,
“8비트 컴퓨터가 최신 기종이던 시절입니다. 처음에는 도서관의 장서를 분류하고 팔만대장경의 목록을 천공카드로 입력하는 것이 전부였어요. 한문 작업은 불가능해 한글로 썼지요. 그러면서도 팔만대장경 전체를 컴퓨터에 담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20년 동안 발목을 잡았고, 일이 엄청나게 커져버렸어요.”
종림 스님은 91년 일본 하나조대학 국제선학연구소 연구원 자격으로 1년을 머물다 돌아왔다. 그는 “팔만대장경을 전산화하겠다”고 선언하고 해인사에 방 하나 얻어서 고려대장경연구소 간판을 내걸었다.
93년 시작한 연구소가 서울 마포, 흑석동, 이태원, 안암동 등의 셋방을 떠도는 동안 인터넷은 하루가 다르게 발달했다. 팔만대장경의 이미지와 글자 하나하나가 컴퓨터 속에 채워졌다.
2000년에는 세계 최초로 53000만자에 이르는 한자를 모두 입력해 팔만대장경 전산화를 마쳤다. 2004년에는 팔만대장경의 옛 한자(이체자·異體字)를 현대의 한자로 바꾸는 작업을 거쳐 ‘고려대장경 2004’를 발표했다. 2004년부터 조사와 촬영을 시작한 남선사 소장 고려대장경 초조본 1800권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은 6년간의 작업 끝에 지난해 11월 마쳤다.
“과거의 유산은 새로운 문화 창조에 바탕이 될 때만 살아있는 문화재가 되는 것입니다. 고려대장경 천 년을 맞아 우리가 세계에 보여줄 것은 대장경이 담고 있는 지식문화, 정신문화 속에 미래 천 년의 씨앗을 뿌리는 일입니다.”
종림 스님은 요즘 또 한 가지 ‘재밌는 일’을 도모하고 있다. ‘첨단 정보화 시대의 최대 불사(佛事)’인 통합대장경이 궤도에 오르면 고향인 경남 안의에 도서관과 전시실, 박물관, 식물원 등을 갖춘 책 박물관을 지을 생각이다. 이미 땅을 마련했고, ‘고반재(考槃齋)’라는 이름도 지어두었다. <시경(詩經)>에서 유래한 말로 은자(隱者)의 즐거움을 뜻한다고 한다.
■ 초조대장경·교장·팔만대장경 통틀어 고려대장경
고려는 현재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보다 220여년 앞선 1011~1087년 거란의 침략을 계기로 첫 번째(초조) 대장경을 만들었다. 송나라 개보대장경(983년)을 복제해 세계 두 번째로 만들어진 대장경이다. 이어 대각국사 의천이 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던 불전의 주석·연구서들을 모아 ‘교장’을 조성했다. 교장은 고려인들의 노력으로 만든 세계 최초의 업적이었다. 초조대장경과 교장은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었으나 몽골의 침략 때 완전히 불타 없어졌다.
초조대장경은 목판의 새김이 정교하고,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판화들도 적지 않게 수록돼 있다고 한다. 일본 학자 난지오 분지우는 현존하는 대장경들 중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우수한 대장경이라고 평가했다.
초조대장경과 교장을 근간으로 팔만장의 목판에 다시 새긴 것이 바로 팔만대장경이라 불리는 재조대장경(1236∼1251)이다. 불교의 힘으로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해 조성했다. 수기대사가 내용의 교정과 편찬의 책임을 맡았다. 초조대장경과 북송판, 거란본을 참고해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제작했다고 한다. 수천만개의 글자가 하나같이 그 새김이 고르다.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조성됐으며 강화도 대장경판당에 보관됐다가 태조 7년(1398) 해인사로 옮겼다.
초조대장경과 교장, 재조대장경을 통틀어 고려대장경이라고 부른다. 초조대장경을 시작으로 재조대장경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240년이 걸렸다. 일본 역시 끊임없이 목판대장경을 조성하려고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 종림 스님은
1944년 경남 안의 출생. 68년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를 졸업했다. 72년 해인사에서 전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여러 절의 선방에서 참선정진했다. 해인사 도서관장, 월간 <해인> 편집장, 대흥사 선원장 등을 역임했다. 91년 일본 하나조노대학 국제선학연구소 연구원. 92년 고려대장경연구소를 설립해 2005년까지 소장을 지냈다. 99년 세계전자불전협의회 공동의장, 2006년 한국불교학결집대회 회장. 2005년부터 (사)장경도량 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 <종림잡설-망량의 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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