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지성 이어령 前장관
ㆍ“생명이 자원, 감동이 경제력인 생명자본주의 시대 대비해야”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시작되는 답변은 청산유수였다. ‘언어의 연금술사’답게 화려한 수사와 보석처럼 반짝이는 비유가 끝없이 이어졌다.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히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77). 평론가, 소설가, 수필가, 언론인, 교수, 장관 등 다양한 인생을 살아온 그는 그동안 남보다 한발 앞서서 한국사회의 변화를 예고하는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줬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2011년 새해 사랑, 공감, 감동, 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생명자본주의’의 도래를 역설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새해를 맞아 그에게 2011년 ‘한국의 길’을 물었다. 인터뷰는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서울 중구 태평로 성공회성당 옆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이루어졌다. 다음 기록은 제한된 지면 때문에 녹취한 인터뷰 내용을 대폭 줄이고 재구성해 기사화한 것이다.
- 얼마 전 연구소에서 한·중·일비교문화 시리즈로 <토끼>라는 책을 냈다. 신묘년에 배워야 할 토끼의 지혜는 무엇인가.
“토끼의 모습, 행동은 모두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의 산물이다. ‘토낀다’는 말은 도망치는 토끼의 동사형이다. 12지(支)의 동물 순서에는 호랑이와 용 사이에 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서 숨차게 달려온 한국의 모습이라고 할까. 그러나 공격형 독재자인 호랑이와 용은 이제 시대에 뒤처졌다. 토끼야말로 21세기 지식정보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상징동물이다. 회동그란 눈과 큰 귀의 예민한 정보력, 짧은 앞다리의 민첩한 주행력, 도망칠 굴을 여러 개 파두는 지혜 그 모든 것이 위기의 시대와 지식정보사회를 살아가는 슬기다.”
- 2011년 한국사회를 어떻게 전망하나.
“창조력과 상상력의 콘텐츠, 디지로그의 위력이 더욱 커질 것이다. 이제부터는 생명자본주의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 생명자본은 지엽적인 대안이 아니라 아예 자본주의의 패러다임 자체를 뒤바꾸는 개념이다. 물질이 아니라 생명이 자원이 되고 감동이 경제력이 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이 전 장관의 말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그동안 그의 예지력이 시대변화의 흐름을 정확하게 짚어냈기 때문이다. 그는 1960년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의 한국문화론인 <흙 속에 저바람속에>를 시작으로 70년대 ‘신바람 문화’, 80년대 ‘벽을 넘어서’, 90년대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라는 슬로건, 2000년대 ‘디지로그(Digilog)’라는 신조어에 이르기까지 10년 단위로 시대를 분석하고 예견하는 화두를 던졌다. 81년에는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써서 일본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디지로그에 이어 생명자본주의도 내가 처음 만들어낸 개념이다. 이제 종래의 자본주의는 끝나가고 있다. 생명자본은 개인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아름다움, 많은 물질을 소비하지 않고도 감동이라는 가치를 생산하는 자본주의다. 노예의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효율이나 기능의 생산이 아니다. 일이 즐거움이 되고 사랑, 공감, 감동, 협력을 기반으로 새로운 생명력을 키우는 멋진 세상이다.”
- 디지로그적 관점에서 현재의 아이폰, 아이패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현상을 설명한다면.
“물건이 아닌 정보가 손끝을 통해 내몸과 하나가 되는 세상이다. 이런 디지털의 육체성을 나는 ‘어금니로 씹는 디지털’이라고 한다. 이것이 디지로그다. 이제는 디지로그 개념들이 모든 분야에서 빠르게 제품화되고 있다. 일본 게임기 시장에서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3’는 실제로 몸을 움직여서 입력을 하는 닌텐도의 ‘위(Wii)’에 패배했다. 닌텐도가 디지로그적 발상을 한 것이다. 아이폰 역시 손만 대면 되기 때문에 고조선 사람도 쓸 정도로 쉽다.”
- 개인적으로 지난해는 어떻게 보냈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쓴 <지성에서 영성으로>가 베스트셀러가 됐다. <흙속에 저바람 속에>와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100만부 이상 나갔지만 10년 넘게 걸렸다. 이 책은 1년 만에 30만부가 팔렸으니 속도로 보면 제일 빠르다. 또 산문집 <어머니를 위한 여섯가지 은유>,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냈다. 대담집 <유쾌한 창조>와 어린이 창조교육을 위한 <이어령 교과서 넘나들기>까지 출판해 어느 때보다 많은 책을 냈다. 나는 50년 동안 나의 사생활을 쓴 적이 없다. <지성에서~>는 내 가족과, 종교에 대한 개인적인 사생활이 들어있는 유일한 책이다. 지난해는 내 인생과 저작생활에서 뒤늦게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됐고 의미있는 건널목이 됐다.”
이 전 장관은 미국에서 검사로 활동하는 딸에게 닥친 암과 실명 위기, 외손자의 질병 등을 겪으면서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세례를 받았다. 그가 무신론자에서 기독교인이 된 것은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 그후 삶이 확 바뀌었나.
“생활이 하루 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아직도 교회는 자주 가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커다란 흐름, 영혼이나 마음의 문제로 눈을 돌렸다는 것이다.”
- 책에 “나의 신앙은 문지방을 서성이고 있다”고 썼는데 이제는 문지방을 넘어섰나.
“아이고, 테레사 수녀님도 못넘어섰다. 나는 지금까지 가족이나 처자식,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했다. 딸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참회로 눈물이 나오는 거다. 외손자를 잃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 아이가 고통으로 울부짖을 때 난 뭐했나…. 그런 죄의식을 느끼기에 참회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혼자 울었지 다른 사람과 함께 울지 못했다.”
- 다른 사람과 함께 우는 것이 사랑인가.
“그렇다. 사랑하는 순간, 함께 우는 순간, 너가 내가 되고, 자연이 내가 되고, 우주가 내가 되고, 더 큰 생명의 세계, 영성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을 느낀다. 진정한 사랑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내려가야 한다.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 우리 사회가 남북, 보수·진보, 4대강 등 극단적인 이념적, 정치적 갈등을 겪고 있다.
“한마디로 긍정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우리가 붙잡고 싸우는 이념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보수나 진보나 바탕은 똑같다는 거다. 가령 4대강 반대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반대가 창조를 향하고 긍정을 향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가 진행된다. 전부 부정하면 우리 역사는 제로가 된다. 나는 <디지로그>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산업화를 이끈 사람들은 산업화의 공을 내세우지 마라. 민주화를 이끈 사람들은 민주화의 공을 내세우지 마라. 창조하는 사람은 강을 건널 때 쓴 배는 다 버리고 간다. 지고 가지 마라.”
- ‘긍정적 사고’라니, 너무 추상적이다.
“오바마는 취임식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60년 전 시골 식당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난 부모님의 아들이 대통령이 된 나라다. 얼마나 훌륭한 나라냐. 이런 것이 긍정적 사고다. 우리나라 같으면 끝까지 찾아내서 복수를 했을 거다.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까뭉개고, 그 반대편에서 또 칼을 갈고 있으니 평화로울 수가 없다. 정치를 전무(全無), 전유(全有)로 하면 안된다. 정치가 성숙해야 국민들이 따라간다.”
-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는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
“한국과 중국, 일본의 문화를 비교한다. 12지신 시리즈를 비롯해 50여가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세 나라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학술세미나를 연다. 고대부터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변전소 역할을 했다. 중국과 일본의 패권주의 사이에서도 대등하게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나는 한·중·일을 가위바위보에 늘 비교한다. 주먹과 보자기만 있으면 게임이 되지 않는다. 한국이 가위의 역할을 해야 동등하게 순환이 된다.”
- 세 나라의 어떤 미래를 꿈꾸나.
“한·중·일이 반도국가, 대륙국가, 해양국가인 것은 절묘한 신의 작품이다. 국경이 크게 변하지 않은 채 2000년을 내려온 경우도 거의 없다. 정치, 경제로는 끝없이 충돌했지만 문화에서는 동질성이 많다. 중국, 일본은 과거에 패권을 추구한 전과자다. 한국만이 무죄한 역사를 물려받았다. 앞으로 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이 되고 아시아에 EU 같은 초국가 형태의 블록이 생기면 한국이 그 수도 역할을 할 수 있다. 이것은 프랑스 학자 자크 아타리의 견해다. 한국은 과거 가장 약했기 때문에 강하고, 과거에 피해자였기 때문에 미래의 길을 열 수 있다.”
이 전 장관은 그동안 88서울올림픽 개·폐막식, 2002한·일월드컵 총괄기획, 새천년준비위원장 등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이벤트를 주도했다. 그는 콸콸 솟는 샘물처럼 평생 쉼없이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지금도 그에게 ‘한 수’ 배우고자 하는 요청이 끊이지 않는다.
- 우리 사회가 끊임없이 ‘이어령’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창조적인 지문(指紋)이라고 부른다. 가령 내 글을 딱 보면 이어령 문장인지 알 수 있다. 단문이고 현재형이고 메타포리칼한 특징이 있다. 그것이 지금은 표준 문장처럼 됐다. 장관 시절에는 내 별명이 이벤트 장관이었다. 이벤트를 통해서 오늘날의 축제문화를 만들었다. 문화부에 기다랗게 배너 현수막 거는 것을 두고 무슨 나이트 클럽이냐고 했지만 이제는 상식처럼 됐다.”
- 상상력을 얻는 원천은 무엇인가.
“지적 호기심이다. 어릴 때부터 남들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한번 더 뒤집어봤다. ‘천지현황’이라는 천자문을 배우면 ‘하늘이 파랗지 왜 까맣냐’고 질문을 했다. 갈릴레오가 혼잣말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얘기했다고 하면, ‘혼잣말인데 누가 들었지요?’ 하고 질문했다. 상상력과 창조력은 그런 호기심과 의구심에서 출발한다. 추사도 제주도 유배시절에 ‘의문당’이라는 편액을 썼다고 한다.”
- 아쉬움이 남는 일은 무엇인가.
“의욕을 갖고 시작했던 경기 디지로그 창조학교에서 손을 뗐다. 새천년준비위원장 때는 ‘천년의 문’ 계획이 무산됐다. 2002년 월드컵 4강에 올랐을 때 너무너무 아쉬웠다. ‘천년의 문’에서 대한민국을 외쳤으면 한국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떠올랐을 거다. 나는 공적인 봉사를 하겠다는 선의에서 시작했는데….”
- 스스로 단점을 꼽는다면.
“단점 투성이다. 나는 리더십과 팔로워십이 없다. 그러니까 항상 외톨이로 지낸다. 포용력과 지도력이 없어서 독창성이 나오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온리원’ 철학을 주창했다. 요즘 광고에 등장하는 ‘넘버원이 되지 말고 온리원이 돼라’는 말은 내가 만들었다.”
- 경향신문 논설위원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다.
“다른 신문을 거쳐 60년대 당시 가장 비판적인 보도를 하던 경향신문 논설위원을 했다. 20대 중반이었다. 주요한 선생의 필화사건으로 신문 폐간까지 당하게 만들었던 명칼럼 ‘여적’을 전담했다. 매일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칼럼을 썼다. 또 최초의 한국문화론인 ‘흙속에 저 바람 속에’를 연재해 낙양의 지가를 올린 것도 경향신문이었다. 포상으로 유럽여행도 다녀왔다. 신문에 연재 에세이라는 장르가 그때 처음 생겼다. 경향신문을 통해 문단이 아니라 국민에게 나의 존재를 인식시켰다. 경향은 군사정권에 밉보여 결국 주인이 바뀌게 됐다.”
- 요즘 신문이 위기라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미디어믹스 시대에 신문, 방송, 인터넷 같은 구분은 의미가 없다. 어떤 단말기에서 누가 보느냐 하는 것만 남는다. 종이신문의 단점은 정보 전달의 속도가 너무 늦다는 거다. 문자, 글, 소리의 경계를 깨는 콘텐츠로 승부해야 한다. 신문사는 미디어가 아니라 미디어 콘텐츠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정보는 신문사의 강점이다. 기자는 고급 정보들로 문화콘텐츠, 정치콘텐츠, 경제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다. 따로따로, 그러나 함께 콘텐츠를 만들어 다양한 마켓에서 하나의 브랜드로 판매해야 한다.”
이 전 장관의 큰아들 이승무 감독의 영화 <워리어스 웨이>로 화제를 바꾸었다. 영화는 이 감독의 시나리오를 본 미국 할리우드의 <반지의 제왕> 제작자가 먼저 나서서 투자를 제안하고 작품제작을 추진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흥행에서 기대에 못미쳤다는 평이다. 이 영화는 장동건의 할리우드 진출작이기도 하다. 이 전 장관은 장동건과 고소영씨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섰다.
- 평론가로서 아들의 영화를 평한다면.
“영화는 흥행이 중요하지만 이 영화는 처음부터 취향이 다른 영화였다. 동양적인 액션에 미국 서부영화의 느낌, 컴퓨터그래픽을 살린 작품이다. 만화적인 인물이 등장하는데 한국에서는 오히려 현실적인 서사로 보는 것 같다. 오페라를 예로 들면 음악이 중요하기 때문에 아예 줄거리를 단순화한 것과 같은 영화다.”
이 전 장관은 아들에게 “영화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만하다”고 격려했다고 한다.
- 전통적인 의미의 문화, 예술의 환경도 크게 바뀌고 있는데.
“기성 문단의 추천이나 신춘문예는 힘을 잃었다. 지금은 작품을 인터넷에 올려서 독자들에게 직접 인정을 받는다. 소위 기성 문화권력 시스템 밖에서 상당히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서 예술이 이루어진다. 문학이라는 장르는 약해졌지만 <해리포터>처럼 셰익스피어가 겪지 못했던 엄청난 시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니까 문학은 죽었고 동시에 부활했다. 스토리텔링은 죽지 않는다. 시는 광고 선전 카피 속에, 캐치프레이즈 속에서 살아난다. 순수문학 장르는 각각 다른 양태로 부활하고 있다.”
-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과 계획은.
“나는 이제 삶의 마지막 매듭을 향하고 있다. 올해는 ‘이어령, 그 마지막 수업’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되도록 사회적인 활동을 줄이고 가슴속에, 머릿속에 있는 마지막 이야기를 다 털어놓으려고 한다. 이제 집필을 할 시간도 없으니까 내가 강의하면 제자들이 DVD와 비디오에 담아 편집해서 책을 만들 것이다. 내 서재는 앞으로 기념관이 될 것이다. 내 책을 모두 전자화해서 모든 사람이 공유하도록 할 생각이다.”
‘저항의 문학’으로 시작해 300여권 저술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마쳤다. 55년 서울대학교 교내지 ‘문리대학보’에 ‘이상론(李箱論)’을 발표했다. 이듬해 ‘문학예술’에 ‘현대시의 환위와 한계’, ‘비유법논고(攷)’가 추천돼 등단했다. 56년 ‘우상의 파괴’를 발표해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문학의 저항적 기능을 역설하며 전후 세대의 이론적 기수가 됐다. 67년 이화여자대학교 강단에 선 후 평생을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명예석좌교수. 경향신문 등 주요 언론사의 논설위원으로 활약했다. 70년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을 창간했고 ‘이상문학상’을 주도했다.
80년 객원연구원으로 일본 도쿄대에서 연구했다. 89년에는 국제일본문화연구소 객원교수를 지냈다. 90~91년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평론집 <저항의 문학>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250만부 이상이 팔린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일본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던 <축소 지향의 일본인>,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디지로그> 등 수많은 명저를 냈다. <장군의 수염> <무익조> <암살자> <전쟁 데카메론> <환각의 다리> 등의 소설을 발표했고, 일흔을 넘어 신앙에 입문해 <지성에서 영성으로>, 첫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냈다.
매년 한 권 이상의 저서를 발표했다. 이 전 장관이 기획자로 참여한 책까지 포함하면 저작물이 300권을 넘어선다. 대한민국 예술원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