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보
좌절을 에너지 삼아 예술혼 불태우는 조각가 문희
김석종
2014. 9. 25. 00:22
[김석종의 漫人譜]
좌절을 에너지 삼아 예술혼 불태우는 조각가 문희
문희(46)라는 여자 조각가가 있다. 조각을 하기 전에는 섬유예술가, 패션디자이너, 공간기획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 여자의 한 시절은 뜨거운 도전과 참담한 실패로 점철됐다. 주룩주룩 장대비 쏟아지는 북한산 자락에서 그 얘길 들었다.
이제는 한물갔다고들 하지만, 한때 서울을 대표하는 젊음의 거리 홍익대 앞에 ‘오아이(OI)’라는 클럽이 있었다. 2006년 문을 열어 한 5년쯤 있다가 사라졌다. 당시로는 홍대 앞에서도 가장 ‘핫’한 명소였다고 한다. 문희가 바로 그 오아이의 주인이었다. 홍대 앞 놀이터 근처 7층 건물 3층 전체를 동굴로 꾸몄다. 모두가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것도 특이했다. 동굴은 조명에 따라 꿈틀꿈틀 변하는 느낌을 줬다. 여름에는 바닥에 시원한 물이 흘렀다.
젊은이들이 ‘부비부비’ 청춘을 불사르는 공간에 그치지 않았다. 클럽과 바와 카페가 결합된 이 별천지에서 날마다 실력 쟁쟁한 인디밴드와 힙합 아티스트, 비보이들의 공연과 물쇼 등의 특별한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그러니 밤이 지루해 못 견디는 젊은이들과 재미있게 놀 줄 아는 청춘들이 떼지어 몰려들었다. 거기에 더해 연극 공연과 미술 전시회, 패션쇼까지 열면서 문화 퓨전의 성공사례를 보여줬다.
화화(花火)라는 예명을 쓰는 남동생은 오아이의 동업자이자 예술가 동지였다. 삐딱하면서 자유분방한 화화는 클럽가에서 이미 소문난 아이디어뱅크였다. 그만큼 대중의 코드를 읽는 눈이 탁월했다. 한 장의 티켓으로 홍대 앞 클럽들을 자유롭게 오가며 즐길 수 있는 ‘클럽 데이’를 처음 만든 것도 화화였단다(가수 이정현이 ‘바꿔’를 부를 때 보여준 튀는 의상과 춤이 화화의 아이디어였다니 그 감각을 알 만하다).
본명이 이문희인 문희는 이화여대 섬유예술과 출신. 대학시절 이미 한국디자인대전 특선, 서울미술제 특선에 이어 뉴욕 파인힐아트갤러리전, 서울미술초대작가전, 씨와 날전 등 그룹전 활동으로 확 떴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잘 키우는 주부로 10년을 살았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숨이 막혔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2003년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당시 9살, 6살 된 딸과 4살 된 아들을 데리고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물론 결혼으로 창창한 예술가의 앞길을 막았던 남편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명문 패션학교인 ‘에스모드 파리’에 들어갔다. 각오는 했지만 34살 주부가 세 아이의 유학 뒷바라지를 해가며 공부하는 게 쉬울 리 없다. 그럼에도 문희는 에스모드를 당당히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렇게 4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동생과 의기투합해 오아이를 열었던 거다. 남매는 어려서부터 삶 자체를 예술로 보는 것으로 죽이 잘 맞았다고 한다. 오아이는 남매가 추구하는 삶 속의 예술, 문화적 쉼, 놀이의 에너지를 제대로 보여준 공간이었다. “오(O)는 지구를, 아이(I)는 주체적인 자아를 뜻하는 작명이었지요. 오아이는 제 삶과 예술의 핵심 키워드예요.”
문희에게는 오아이를 독자적인 패션 브랜드로 키우겠다는 야심도 있었다. 오아이에서 한달에 한 번씩 패션쇼를 연 것도 그 때문이다. 이 기간 파리 프레타 포르테 참가, 파리 유학파 패션전, 서울 국제영화제 개막식 초청 패션쇼 등 국내외에서 맹활약했다. 그러다가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오아이가 대단한 인기를 누리자 건물주는 재계약을 거절했다.
오아이는 갑자기 문을 닫았고, 거기에 투자했던 수억원이 고스란히 문희의 빚으로 남았다. 문희가 오아이를 그만둔 건 세입자를 보호하지 않는 우리나라 부동산 정책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에 시댁과 친정에서 하던 사업도 차례로 부도가 났다. 참 외롭고 고통스러운 날들이 이어졌다(복잡한 가정사는 딱 여기까지만 쓰기로 약속했다).
한동안 오아이의 경험을 살린 공간디자인으로 재기를 모색했다. 고정관념을 내던진 아이디어들로 아웃도어 브랜드 매장, 커피 전문점, 병원, 패션몰 등의 공간을 꾸며줬다. 지금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대표적인 실패작이 돼버린 한강르네상스의 ‘세빛둥둥섬’ 아이디어를 문희가 처음 냈다고 한다. 그랬는데 서울시가 아이디어만 뺏어가 왜곡했다는 거다. 처음 구상대로 ‘움직이는 섬, 쉼의 섬’을 만들었으면 성공했을 거라고 문희는 말했다.
동대문시장을 살리기 위해 ‘옷의 날’을 만들자는 제안도 했는데 오 시장이 물러나면서 흐지부지됐다. 재고품 옷을 대폭 할인 판매하는 날을 만들어 국내외에 알리자는 게 핵심이다(지금도 살려 쓸 수 있는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본다). 문희는 또 성남시 고기리유원지에 고물로 버려진 비행기를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미는 작업에도 손을 댔다. 이 또한 동업자들이 약속을 어긴 탓에 빈손으로 물러났다. 이렇게 하는 일마다 실패하기도 쉽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바닥까지 내려가고 보니 오기가 솟구치더란다. 어느날 혼자 구상해둔 마네킹 스케치를 꺼내 보다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명품 브랜드 패션숍에 어울리는 설치미술을 해보자. 조각가 선배들은 본격적으로 조각을 해보길 권했다. 처음에는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흙에 매달렸다.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그럴수록 더 집요하게 부딪쳤다. 그의 종합예술적 재능과 색채 감각, 그리고 타고난 영감이 한꺼번에 분출하기 시작했다. 문희로서는 또 다른 광맥을 찾은 셈이다. “장르는 수단에 불과하죠. 예술정신과 감수성은 하나로 다 통한다고 봐요.”
온몸을 던진 2년여의 작업 끝에 지난달에는 서울 인사동 갤러리 미술세계에서 첫 조각 전시회인 ‘인(人), 바람이 일다’전을 열었다. 브론즈, 유리, 레진(합성수지)의 재질로 만든 20여점의 조각작품을 선보였다. 전시장에 들어가보니 문희의 말대로 자연의 바람과 내면의 바람이 가득찬 듯했다. 문희가 주로 내놓은 인체와 마네킹 조형은 개인사의 상처와 인간의 원초적 고통이 생생하게 응결된 모습으로 보였다. 문희의 자화상인 듯 바람의 외투를 둘러쓴 여인상 등 원시성과 싸우는 인간 군상들이 거기 있었다. ‘초짜’ 조각가의 전시임에도 어떤 대가의 무게감이 느껴졌달까. 어느 평론가는 “문희는 한국 현대미술에 또 하나의 새로운 형식을 제안한다”고 극찬했다.
문희는 벌써 ‘~일다’ 연작으로 ‘바람’에 이어 ‘욕망’을 주제로 새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실패가 커야 얻는 것도 크다는 걸 알게 됐죠.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보다 타인을 아는 일에 시간을 다 썼어요. 이제 어떤 일이 닥쳐도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김석종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이제는 한물갔다고들 하지만, 한때 서울을 대표하는 젊음의 거리 홍익대 앞에 ‘오아이(OI)’라는 클럽이 있었다. 2006년 문을 열어 한 5년쯤 있다가 사라졌다. 당시로는 홍대 앞에서도 가장 ‘핫’한 명소였다고 한다. 문희가 바로 그 오아이의 주인이었다. 홍대 앞 놀이터 근처 7층 건물 3층 전체를 동굴로 꾸몄다. 모두가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것도 특이했다. 동굴은 조명에 따라 꿈틀꿈틀 변하는 느낌을 줬다. 여름에는 바닥에 시원한 물이 흘렀다.
젊은이들이 ‘부비부비’ 청춘을 불사르는 공간에 그치지 않았다. 클럽과 바와 카페가 결합된 이 별천지에서 날마다 실력 쟁쟁한 인디밴드와 힙합 아티스트, 비보이들의 공연과 물쇼 등의 특별한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그러니 밤이 지루해 못 견디는 젊은이들과 재미있게 놀 줄 아는 청춘들이 떼지어 몰려들었다. 거기에 더해 연극 공연과 미술 전시회, 패션쇼까지 열면서 문화 퓨전의 성공사례를 보여줬다.
화화(花火)라는 예명을 쓰는 남동생은 오아이의 동업자이자 예술가 동지였다. 삐딱하면서 자유분방한 화화는 클럽가에서 이미 소문난 아이디어뱅크였다. 그만큼 대중의 코드를 읽는 눈이 탁월했다. 한 장의 티켓으로 홍대 앞 클럽들을 자유롭게 오가며 즐길 수 있는 ‘클럽 데이’를 처음 만든 것도 화화였단다(가수 이정현이 ‘바꿔’를 부를 때 보여준 튀는 의상과 춤이 화화의 아이디어였다니 그 감각을 알 만하다).
본명이 이문희인 문희는 이화여대 섬유예술과 출신. 대학시절 이미 한국디자인대전 특선, 서울미술제 특선에 이어 뉴욕 파인힐아트갤러리전, 서울미술초대작가전, 씨와 날전 등 그룹전 활동으로 확 떴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잘 키우는 주부로 10년을 살았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숨이 막혔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2003년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당시 9살, 6살 된 딸과 4살 된 아들을 데리고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물론 결혼으로 창창한 예술가의 앞길을 막았던 남편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명문 패션학교인 ‘에스모드 파리’에 들어갔다. 각오는 했지만 34살 주부가 세 아이의 유학 뒷바라지를 해가며 공부하는 게 쉬울 리 없다. 그럼에도 문희는 에스모드를 당당히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렇게 4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동생과 의기투합해 오아이를 열었던 거다. 남매는 어려서부터 삶 자체를 예술로 보는 것으로 죽이 잘 맞았다고 한다. 오아이는 남매가 추구하는 삶 속의 예술, 문화적 쉼, 놀이의 에너지를 제대로 보여준 공간이었다. “오(O)는 지구를, 아이(I)는 주체적인 자아를 뜻하는 작명이었지요. 오아이는 제 삶과 예술의 핵심 키워드예요.”
문희에게는 오아이를 독자적인 패션 브랜드로 키우겠다는 야심도 있었다. 오아이에서 한달에 한 번씩 패션쇼를 연 것도 그 때문이다. 이 기간 파리 프레타 포르테 참가, 파리 유학파 패션전, 서울 국제영화제 개막식 초청 패션쇼 등 국내외에서 맹활약했다. 그러다가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오아이가 대단한 인기를 누리자 건물주는 재계약을 거절했다.
오아이는 갑자기 문을 닫았고, 거기에 투자했던 수억원이 고스란히 문희의 빚으로 남았다. 문희가 오아이를 그만둔 건 세입자를 보호하지 않는 우리나라 부동산 정책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에 시댁과 친정에서 하던 사업도 차례로 부도가 났다. 참 외롭고 고통스러운 날들이 이어졌다(복잡한 가정사는 딱 여기까지만 쓰기로 약속했다).
한동안 오아이의 경험을 살린 공간디자인으로 재기를 모색했다. 고정관념을 내던진 아이디어들로 아웃도어 브랜드 매장, 커피 전문점, 병원, 패션몰 등의 공간을 꾸며줬다. 지금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대표적인 실패작이 돼버린 한강르네상스의 ‘세빛둥둥섬’ 아이디어를 문희가 처음 냈다고 한다. 그랬는데 서울시가 아이디어만 뺏어가 왜곡했다는 거다. 처음 구상대로 ‘움직이는 섬, 쉼의 섬’을 만들었으면 성공했을 거라고 문희는 말했다.
동대문시장을 살리기 위해 ‘옷의 날’을 만들자는 제안도 했는데 오 시장이 물러나면서 흐지부지됐다. 재고품 옷을 대폭 할인 판매하는 날을 만들어 국내외에 알리자는 게 핵심이다(지금도 살려 쓸 수 있는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본다). 문희는 또 성남시 고기리유원지에 고물로 버려진 비행기를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미는 작업에도 손을 댔다. 이 또한 동업자들이 약속을 어긴 탓에 빈손으로 물러났다. 이렇게 하는 일마다 실패하기도 쉽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바닥까지 내려가고 보니 오기가 솟구치더란다. 어느날 혼자 구상해둔 마네킹 스케치를 꺼내 보다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명품 브랜드 패션숍에 어울리는 설치미술을 해보자. 조각가 선배들은 본격적으로 조각을 해보길 권했다. 처음에는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흙에 매달렸다.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그럴수록 더 집요하게 부딪쳤다. 그의 종합예술적 재능과 색채 감각, 그리고 타고난 영감이 한꺼번에 분출하기 시작했다. 문희로서는 또 다른 광맥을 찾은 셈이다. “장르는 수단에 불과하죠. 예술정신과 감수성은 하나로 다 통한다고 봐요.”
온몸을 던진 2년여의 작업 끝에 지난달에는 서울 인사동 갤러리 미술세계에서 첫 조각 전시회인 ‘인(人), 바람이 일다’전을 열었다. 브론즈, 유리, 레진(합성수지)의 재질로 만든 20여점의 조각작품을 선보였다. 전시장에 들어가보니 문희의 말대로 자연의 바람과 내면의 바람이 가득찬 듯했다. 문희가 주로 내놓은 인체와 마네킹 조형은 개인사의 상처와 인간의 원초적 고통이 생생하게 응결된 모습으로 보였다. 문희의 자화상인 듯 바람의 외투를 둘러쓴 여인상 등 원시성과 싸우는 인간 군상들이 거기 있었다. ‘초짜’ 조각가의 전시임에도 어떤 대가의 무게감이 느껴졌달까. 어느 평론가는 “문희는 한국 현대미술에 또 하나의 새로운 형식을 제안한다”고 극찬했다.
문희는 벌써 ‘~일다’ 연작으로 ‘바람’에 이어 ‘욕망’을 주제로 새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실패가 커야 얻는 것도 크다는 걸 알게 됐죠.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보다 타인을 아는 일에 시간을 다 썼어요. 이제 어떤 일이 닥쳐도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김석종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