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보

전통공예계 대변인 이칠용

김석종 2013. 8. 1. 11:23

그렇잖아도 속상한 일이 많은 이칠용(67)이 또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국빈방문 길에 가져가서 선물한 주칠함, 옻칠채화함, 화각함 같은 우리나라 전통공예품 때문이다. 특히나 주칠함은 서울 답십리에서 고가구 수리점을 하는 이가 오래전 합성도료인 ‘카슈’ 칠을 해서 만든 물건이라고 한다. 그걸 조선시대 궁중에서 썼던 귀한 칠기공예품인 주칠함이라고 부르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못박았다. 다른 공예품들도 ‘국격에 맞게’ 최고수준의 공예인들에게 맡겨 공들여 준비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며, 내내 아쉬워했다.



노상 이런 식이다. 이칠용의 직함은 한국공예예술가협회 회장. 세월에 등떠밀려 일찌감치 골방의 아웃사이더가 돼버린 이 시대 전통공예 ‘장인’들을 대변하는 게 그가 주로 하는 일이다. 공예계 내부에서 툭하면 벌어지는 밥그릇 싸움에서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해결사로도 호가 났다.

 


한국공예예술가협회 이칠용 회장. (경향DB)


그가 이처럼 실망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박 대통령이 국정기조의 하나로 내세운 ‘문화융성’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박 대통령은 지난 25일 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원회 첫 회의에서 “이제 ‘한류’를 한글과 한식, 한옥, 공예 등 우리 문화 전반으로 확산시키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 땅의 장인들에게 비전(秘傳)된 전통공예야말로 문화융성의 전략무대가 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면서 사례로 든 게 문화체육관광부 주최로 지난 4월에 이탈리아 밀라노 트리엔날레 디자인 뮤지엄에서 열린 ‘한국공예의 법고창신’전이다.


이탈리아 전문가들이 달항아리, 은입사 향로, 건칠 항아리, 옻칠 콘솔, 나전칠기 이층장, 도자 의자, 한지 조명등, 한복, 궁중채화, 전통침구, 나전칠기 소반 등 한국 공예품에 감탄을 연발했다는 게 기획위원으로 참여했던 그의 전언이다. 그들은 “그냥 모던한 게 아니라 슈퍼모던하다. 전통공예라지만 현대의 첨단 디자이너가 제작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다”(예술평론가 크리스티나 모로치) “한국인들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작품으로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건축가 마리오 벨리니)고 극찬을 쏟아냈단다. 이탈리아 유명 디자이너와 영국의 대영박물관은 건칠 항아리를 비싼 값에 샀고, 빅토리아 박물관은 도자기 작품을 소장품으로 구입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칠용은 이 극과 극의 두 가지 상황설명으로 우리나라 전통공예가 처한 현실과 가능성을 다 말해버린 셈이다. “다들 전통공예를 한물 간 것으로 여기고 찬밥 취급하지만 법고창신! 수공예 전통을 현대적인 쓰임새로 재창조하면 얼마든지 세계적인 ‘명품’을 내놓을 수 있어.” 그는 케이팝 같은 한국발 엔터테인먼트 한류에 100% 한국 순수혈통인 전통공예까지 보탠다면 한국문화가 광채를 더할 것이라고 했다. 하긴 전통공예품 하나마다 외국인들의 눈길을 끌 만한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요소가 무궁무진하다.


이칠용은 나전칠기 분야가 전공이긴 해도 여느 전통공예인과는 좀 다른 길을 걸었다. 파월장병 출신으로 제대 후인 1970년 나전칠기에 입문했다. 곧장 서울 이문동에 ‘한미공예사’를 차려 1970~1980년대 나전칠기 제품의 일본 수출로 큰돈을 벌었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 유명 장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국내 최초로 나전칠기의 기술·이론 전문서를 펴냈다. 또 ‘한국공예문화’라는 월간지를 4년 넘게 발행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 부도가 났다. 주거문화(아파트)가 바뀌고 가전제품 같은 서구의 첨단 생활용품이 밀려들면서 나전칠기뿐만 아니라 전통공예 전체가 사양길에 접어든 거였다. 안방, 사랑방, 대청마루, 부엌, 밥상머리를 지켰던 공예품들은 설자리를 잃었다. 이칠용은 1994년 모든 전통공예 분야를 아우르는 한국공예예술가협회를 결성했고, 장인들의 열악하고 힘든 현실을 바꾸는 일에 앞장섰다.





허구한 날 ‘공예운동’에 매달리느라 돈벌이는 뒷전이다보니 그의 개인사는 참 신산했던 모양이다. 오래전 이혼했고, 자녀와도 떨어져서 셋방살이를 하는 처지다. 그래도 끊임없이 공예품의 해외진출을 모색했다. 그가 공예인들을 이끌고 일본과 유럽에서 작품전을 열거나 국제박람회에 참가한 게 50차례가 넘는다. 전통공예 제작방식에 문양이나 쓰임새는 유럽인 취향에 맞춘 칠기 명함지갑, 손거울, 보석함, 매듭, 컵받침 등은 외국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하여튼 전통공예품을 고리짝에서 끄집어내 외국에 소개한 것은 태반은 그가 있어서 가능했다. 이칠용(李七龍)은 옻칠공예를 좋아하는 일본에서는 옻칠을 뜻하는 ‘칠’자를 써서 ‘李漆龍’이라는 명함을 들고다닌다.


그는 빠른 서구화와 잘못된 정부 정책, 공예인들의 낮은 의식수준이 한 묶음으로 우리나라 전통공예 몰락을 가져왔다고 진단했다. 특히 무형문화재 제도가 오히려 전통공예를 망쳤다고 했다. 무형문화재(중요, 시, 도)에서 탈락하면 한 세월을 바치고도 졸지에 밥줄이 끊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거다. 공예인들이 하나같이 무형문화재에만 목을 매다 보니 선정 과정에 뒷말이 심심찮게 나왔다. 가짜 경력으로 인간문화재가 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제자와 스승 간에 철천지원수가 되기도 한다. 젊은이들은 험난한 장인의 길을 외면했고, 전국의 대학교에선 공예과가 아예 전멸을 해버렸다. 서울 인사동 등 관광상품 가게는 국적 불명의 값싼 공예품이 점령한 지 오래다.


서울 장교동 장교빌딩 지하에 있는 한국공예예술가협회 사무실(벽 없이 탁 트인 상가 한가운데 책장으로 간신히 칸막이를 하고 책상을 놓았으니 사무실이라고 하기에도 뭣하다)은 ‘억울한 장인’들이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공예계 민원실’이다. 육군박물관 금고(金鼓·전쟁 때 쳤다는 청동 징) 가짜 사건, ‘사이비’ 무형문화재의 방짜유기세트 TV홈쇼핑 판매 사건, 문화재청 직원의 인간문화재 협박편지 사건 등이 그의 제보로 언론에 보도됐다. 공예계의 문제점과 대안들을 써서 신문에 기고한 원고도 부지기수다.


그가 말했다.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문화재와 생활도구들이 모두 수공예로 만든 공예품이다. 그걸 ‘오늘에 되살려’ 천년 뒤의 후손에게 이어줘야 한다. 수공업 장인들에게 대중화, 산업화, 세계화의 길만 제대로 열어주면 우리 시대 명품도 얼마든지 나온다. 전통공예계에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21세기 각광받는 벤처산업으로 키울 수 있는 길을 찾아봐야 한다.”


이칠용은 노상 입고다니는 모시 한복 저고리에 찌개 국물이 튀는 것도 모르고 전통공예 세계화의 꿈을 털어놨다. 식당 창밖으로 장맛비가 거세게 쏟아졌다. 이런 이가 있어서 한국의 전통문화는 그나마 한 발짝씩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