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멸종시킨 독도 바다사자, 강치를 아십니까
[여적]독도 강치
아직도 한반도에 호랑이가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무예 고수 정용진, 산악인 김종수는 호랑이 발자국을 찾아 10년 넘게 지리산과 설악산을 헤메고 다닌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호랑이와 마주쳤다는 소식은 못들었다.
이 땅의 호랑이는 일제시대 자취를 감췄다. 조선총독부는 ‘야마모토 정호군(征虎軍)’이라는 특수부대를 만들어 조선땅의 호랑이를 사냥했다. 1915~1916년에만 호랑이 24마리, 표범 136마리, 곰 429마리, 늑대 230마리를 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동해바다 독도에서는 일제에 의해 해양포유류인 강치 사냥이 이루어졌다. 독도는 오랫동안 강치의 천국이었다. 학자들은 3만~5만마리의 강치가 서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때 ‘백령도는 물범, 독도는 강치가 지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리앙쿠르대왕이라고 불렸던 세계 최대 강치의 박제
강치는 바다사자의 한 종류다. 수컷은 몸길이 2.5m, 몸무게 500㎏ 내외로 엄청나게 크다. 일부다처제 방식으로 짝짓기를 한다. 강치는 가지, 가제라고도 불렸다. 독도의 옛 이름도 가지도, 가제도다. 지금도 독도의 서도에는 강치가 헤엄치다 올라와 쉬거나 새끼를 낳고 키우던 큰가제바위, 작은가제바위가 있다.
구한말 일본 시마네현의 수산업자 나카이 요사부로가 독도 강치를 잡아 떼돈을 벌었다. 이것은 독도와 강치에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강치 사냥은 일본이 독도를 침탈하는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 강치 가죽은 비단처럼 부드러워서 고급 가방을 만드는 재료로 인기였다. 강치가죽 가방이 파리 박람회에서 금상을 타기도 했다. 지방에서는 기름을 뽑았다. 당시 강치 한 마리가 소 10마리 값이었다고 한다. 강치잡이는 최고의 돈벌이였던 것이다.
나카이는 이런 독도 어업권을 독점하고 싶었다. 그는 독도가 ‘주인없는 무인도’라고 주장하며 일본 영토로 편입해 달라는 청원을 한다. 1905년 일본 정부는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자국 영토에 포함시키는 시마네현 고시 40호를 선포한다. 당시 러일전쟁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상태여였다. 이처럼 조선의 주권행사가 어려운 틈을 타 일본은 독도를 자국 영토에 포함시켜버린 것이다. 학명까지 일본강치(Zalophus japonicus)로 등록했다.
시마네현 고시는 일본이 지금까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됐다. 일본 어부들은 1904년부터 8년간 독도에서 1만4000여마리의 강치를 잡았다고 한다. 한창 강치를 도살할 때는 독도에서 87㎞ 떨어진 울릉도에서도 피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새끼는 산채로 잡아서 서커스단에 팔았다. 일본 작가 이즈마 마사히코는 <영해 없는 섬, 독도>라는 책에서 나카이를 ‘바다의 살육자’라고 맹비난했다.
이런 남획으로 인해 독도에서 강치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마침내 자취를 감추었다. 강치는 1975년 마지막 목격된 이후 현재 완전히 멸종된 것으로 분류돼 있다. 그런데 강치 멸종의 당사자인 일본 시마네현은 최근 예쁜 강치 캐릭터를 만들어 ‘독도는 일본땅’ 홍보에 사용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다.
그래서 해양수산부가 독도 강치 복원에 나서기로 했다는 소식은 더 반갑다. 독도강치복원국민운동본부’라는 민간단체도 결성돼 있다. 또다른 민간단체 ‘보고 싶다 강치야! 사랑본부’는 3년 전부터 독도에 실물 크기의 강치상(像)을 세우자고 제안해왔다. 12일에는 독도 선착장에서 ‘보고 싶다 강치야’ 콘서트를 연다고 한다. 독도 바다사자, 강치들이 바다에 울려퍼지는 아름다운 선율을 따라 독도로 돌아오는 상상을 해본다.
/고문서에서 보는 독도 강치/
강치는 물개와 비슷하게 생겼다. 울릉도 사람들이 가지, 가제라고 부르는 강치는 문헌에 가지어(嘉支魚), 해려(海驢)라고 기록돼 있다. 해려는 ‘바다 당나귀’라는 뜻이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울릉도는 동해 가운데 있으며(…) 산물에는 가지어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정조실록 정조 18년 6월조에도 ‘월송 만호 한창국이 하룻만에 울릉도에 도착했으며 가지도에 가서 가지어 두 마리를 포수가 잡아서 그 가죽을 대나무, 자단향 등과 함께 토산물로 가져오고 지도 한 장도 그려왔다’는 기록이 있다. 독도는 가지도, 즉 강치섬이라 불릴 정도로 강치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04년(광무8년) 일본 해군성(海軍省) 간행의 조선연안수로지에도 매년 여름 강치를 잡기 위햐, 울릉도 사람들이 독도에 작은 집을 짓고 수십명씩 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