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보

인사동파 기인, 성(性) 이론 고수의 '공개구혼장'

김석종 2014. 9. 30. 16:54

 

 

   '지여처다 사랑법' 전하는 인사동 기행 고수 송현

   

    오랜만에 송현(67)을 만났더니 이번에는 뜬금없이 비둘기 친구 얘기를 하는 거다. 2년 전 쯤 조계사 마당에서 만난 비둘기에게 ‘왼다비’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고 한다. ‘왼쪽 다리가 성치 못한 비둘기’였기 때문이다. 때때로 땅콩이나 쌀 한 줌씩 가져다 모이를 주면서 친해졌단다. 그가 조계사 마당 벤치에 앉아 “왼다비야” 하고 부르면 금방 왼다비가 절뚝거리며 나타난다고 했다. 그랬는데, 요즘 두달 째 왼다비를 보지 못했다며 쌀이 든 비닐봉지를 만지작거렸다. “마지막 만났을 때 괴로운 표정을 짓더라구. 아마 죽음을 앞두고 하직 인사를 한 거 같아.”

 


 이런 송현은 어떤 하나의 테두리로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난해한 사람이다. 하는 일도 아주 다양하면서 알쏭달쏭하다. 시인, 소설가, 아동문학가, 한글운동가, 한글기계화연구가, 한글자형(글꼴)학자, 칼럼니스트, SS이론창안자, 라즈니쉬연구가, 방송인, 명상가…. 여기에 청산유수의 ‘구라’로 한 경지를 더해 추종자들에게는 ‘교주’ 노릇까지 하는 희한한 기인이다.
 송현은 과거 괴짜, 예인, 방외지사 등 방랑과 기행의 고수들이 진을 쳤던 인사동을 주 무대로 활동했다. 일테면 ‘인사동파’ 한량 출신이다. 내가 오랫동안 지켜본 바로는 인사동 ‘꼴통’들 중에서도 송현은 좀 남달랐다. 그들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늘 한발 비껴난 것처럼 모종의 진지함과 무게감을 잃지 않는 거였다. 그러면서도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정중한 게 교주 송현의 처세법이다.
 그는 하고 다니는 외양에서도 사뭇 튄다. 색깔만 다른 모택동 모자(모자의 정확한 명칭은 송현도 모른다)를 100개 넘게 사놓고 바꿔쓰고 다닌다. 새로 산 셔츠와 바지를 이리저리 가위질해서 입는 게 또 송현만의 스타일이다. 늘상 메고다니는 큼지막한 가방도 50개가 넘는단다. 송현이 가방을 홀딱 뒤집어 보여줬다. 그 속에 비둘기 모이로 준비해 가지고 다니는 쌀을 담은 비닐 봉지, 금강경 책, 휴대용 방석, 그리고 7권이나 되는 노트이 들어있었다. “그늘 좋은 곳을 만나면 바로 방석을 펴고 자리를 만든다. 책을 읽으면 거기가 송현 도서관이고, 명상을 하면 송현 명상처다.” 
 송현은 메모광이다. 스스로 메모 전문가라고 한다. 가방 속 메모 노트는 일정 기록용, 글쓰기 소재 메모용, 책 출판 아이디어용, 좋은 글을 옮겨적는 사경용 등으로 구분해 쓴다.
 그렇게 한결같은 모습으로 거의 40년을 인사동 거리를 누비고다닌 그다(최근 인사동의 낭만이 싹 다 사라지면서 그의 발길도 뜸해졌다). 지금도 똑같은 차림에 과장되게 파안대소하는 모습까지 하나도 안 변했다.
 자, 이제 송현이 평생에 걸쳐 연마했지만 세상에서는 크게 빛보지 못한 내공과 기상천외한 무용담으로 들어가보자. 이제는 10년 쯤 지난 얘기지만 송현은 세상이 다 알도록 떠들썩한 재혼으로 못말리는 기인 행각의 정점을 찍은 바 있다. 서른 한 살에 이혼하고 혼자 살던 송현이 쉰 여덟살 되던 해 <샘이깊은 물>이라는 여자잡지에 원고지 80장에 달하는 ‘공개구혼장’을 실었다.
 “저의 이름은 송현입니다. 올해 쉰넷, 돼지띠의 몸과 마음이 건강한 남자입니다(키 173cm, 몸무게 80kg). 이날까지 어디 아파 약을 먹어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외모와 경력과 건강상태와 가족상황과 취향과 재산상태까지 구구절절 소개하는 글이었다. 너무나 솔직하고 진지해서 흥미진진했던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동아대 국문과 출신으로 중·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미당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했다. 공병우 박사와 인연이 돼서 갑자기 교사를 그만두고 (주)공병우 타자기 대표이사를 지냈다. KBS 라디오와 TV 그리고 몇몇 케이블 TV에서 ‘행복’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 진행, 어린이 잡지 월간 ‘굴렁쇠’와 월간 ‘디자인’의 편집주간, 서울예술신학대학의 문예창작과 교수 등을 했다.
 총각 교사 시절 네 살짜리 딸아이가 있는 이혼녀를 사랑해서 결혼해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고 살다가 헤어졌다(공개구혼 전에 첫 결혼 사연도 같은 잡지에 ‘내 혼인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이게 또 눈물겹다). 그 기간에 세 권의 시집을 포함해 50여권의 책을 썼다. 그중 그림동화 <도깨비학교 문고>는 100만 권 이상이 팔린 밀리언셀러다.
 송현의 구혼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게 ‘결혼 조건’이었다. ‘제가 꿈꾸는 행복한 생활에 대해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큰 소망 하나는 풀을 빳빳하게 먹인 하얀 옥양목 홑청을 한 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도 외모는 남에게 호감을 주는 정도면 족하다, 이혼의 쓰라린 상처가 있는 여자를 원한다, 제 손으로 키운 자식이 딸려 있기를 바란다, 멸치 젓갈과 조용필 노래와 바바리 코트 입기를 좋아하는 여자면 좋겠다 등등 바라는 것이 스물 여섯가지나 됐다.
 이게 반응이 엄청났다. 무려 650여명으로부터 청혼이 쇄도했다고 한다. 그중 한 통의 편지가 송현의 눈길을 붙잡았다. 그 여인과 1년의 데이트 끝에 ‘새혼’을 했다. 그가 ‘재혼이라는 어감이 달갑지 않아’ 새로 혼인한다는 뜻으로 새로 만든 말이 새혼이다(새혼은 네이버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다). 그의 이런 조어벽은 시도 때도 없이 발동한다.
 새혼한 아내와는 ‘나따사함’(나흘은 따로, 사흘은 함께 산다는 뜻의 조어) 부부로 살았다. 살림을 합치지는 않고, 남편은 서울에서 아내는 수원에서 지내며 서로의 집을 오갔다. 송현의 이런 두번째 결혼은 KBS TV ‘인간극장’에 5부작으로 소개됐다.
 송현은 일생 사상가 함석헌, 한글학자 최현배,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만든 공병우, <뿌리깊은 나무> 발행인이었던 한창기, 교육자이자 동화작가 이오덕 같은 대단한 사람들을 직접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한 걸 자랑삼는다. 고등학교 때부터 함석헌 선생의 부산모임을 따라다녔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명동성경모임, 노자모임 등에 꼬박꼬박 참석해 성경·고전과 함께 역사적 인간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있게 사는 것인지를 배웠다고 한다.
 송현은 특히 공병우 박사와 10년 넘게 한글기계화운동과 한글자판통일운동을 함께 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한때 공병우 타자기라는 게 대단했다. 그는 지금도 공병우식 자판이 과학적이고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컴퓨터 표준자판이 비과학적이라고 자주 열을 올린다. “세벌식이야말로 가장 정확하고 빠르며 간편한 한글 자판 방식이다.” 하지만 이미 세상의 관심이 멀어진 터여서 그의 외로운 싸움은 좀 무모해 보인다. “무슨 소리! 나는 전사이고 지금 교전중이다.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무릎 꿇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게 내 방식이다.” 그럴 때는 함석헌에게서 배운 지사적인 기질이 샘솟는 것 같다.
 송현의 또다른 스승은 그에게 강한 영감을 준 인도의 명상가 라즈니쉬다. 그는 어느날 라즈니쉬가 꿈에 나타나 ‘비말까르띠’(‘순수’ 또는 ‘본질’을 뜻하는 범어)라는 법명을 주고 제자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거의 믿거나 말거나식 구라로 보이지만 그가 하도 진지하게 얘기 하니 살짝 믿고싶어지기도 한다. 그는 <젊은 날에 만나야 할 영적스승 라즈니쉬>, <라즈니쉬예술론>이란 책도 썼다. 어쨋든 송현은 이 스승들의 기일에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단식을 한다.
 송현에게는 사람들의 눈길을 확 잡아끌만한 히든카드가 하나 더 있다. 그가 30년 연구로 집대성했다는 송현의 섹스 이론, SS이론이 그거다. 그는 ‘SS복음’을 세상에 전하려고 한국SS이론연구소를 만들었다. 한때 그 홈페이지 접속자가 10만명이 넘으면서 송현은 ‘SS교주’로 통했다. 여기서는 그 민망한 신통술을 전할 수가 없으니 기대하지 마시라. 다만 그가 “성이란 서로 상대방의 가려운데를 정확히 긁어주는 것” “상대의 악기를 더 잘 다뤄야 고수다"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는 정도만 밝히고 넘어가련다.

 송현의 장안평 사무실에는 ‘한글문화원’과 ‘무향선원(無向禪園)’ 간판이 달려 있다. 그는 자신이 정신세계의 유목민이자 자유인이라고 말한다. 그가 내세우는 것이 ‘지여처다주의’, 다른 말로는 ‘무향주의’다. 지여처다는 ‘지금, 여기서, 처음 만난 것처럼, 다시 못 만날 것처럼’을 줄여서 명명했다. 지여처다를 독서법, 명상법, 사랑법, 화법, 심지어 수영법까지 이리저리 활용한다. 이 말을 할 때의 송현은 진지하고 엄숙해진다.
 그는 요즘 사랑과 공부, 두가지에 몰두하고 있다. 사랑과 공부의 목적은 행복. 그걸 위해 인터넷상에 ‘송현의 행복대학교’와 ‘송현의 행복대학원’을 세웠다고 한다. 대학과정을 마쳐야만 대학원 강의를 들을 수 있단다. 전공과목이 ‘잘하는 법’ 딱 한가지라고 했다. 지여처다는 그걸 이루는 수행법이다.
 얼마 전 제자의 도움으로 충북 제천에 수련원도 열었다. “사람은 평생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계속 성장해야 한다. 특히 부부는 함께 성장하지 못하면 통할 수 없다. 당신이 멈춰선 순간에도 갠지스강은 천리 만리 흘러가고 있다.” 송현의 인생은 일관성이 없고 모순일 때도 많다. 생활이 그리 빛나보이거나 실속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세상 한쪽에 이런 정열적인 기행의 아웃사이더가 있어서 가끔씩은 답답한 현실의 질서와 가치에 시원한 바람구멍이 뚫리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