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餘行)]해인사에서 보낸 며칠
[여행(餘行)]절로 가는 길(1)
/해인사에서 보낸 며칠/
늦은 여름휴가를 혼자 해인사에서 보냈다. 가야산은 높고, 비는 내리다 그치고, 또 내리다 그쳤다. 비 개인 하늘에 휘영청 달 떠가는 푸른 밤도 지켜봤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인터넷 같은 세상 소식 딱 끊고, 전화도 껐다.
아는 이 없으니 꼭 필요한 말만 하면 되었다. 말과 살이의 독재에서 해방된 몸과 마음에 고요가 물처럼 고이고 있었다. 일찍 잠들고 일찍 깨어 싱싱한 새벽도 만났다. 신새벽 맑은 정신으로 문을 열면 날마다 가야산 숲이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흐물흐물했던 내 머리통도 호두알처럼 단단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취(泥醉)로 흐느적대던 도시의 나날들이 같잖았다.
코끝이 싸해지는 솔바람 속에 새소리로 발걸음 박자를 맞추며 천천히 걸어서 해인사 경내와 암자들을 돌아다녔다. 내가 묵는 청백당은 넓은 잔디밭에 새로 조성된 '비림'과 오솔길로 이어져 있었다. 성철 스님의 사리탑과 자운스님 혜암스님의 부도탑이 거기 있었다. 어느날은 성철 스님 사리탑 앞에서 한 비구니 노스님이 신발을 벗고 오체투지로 오래오래 절을 올리고 있었다.
산사의 아침 공기를 마시며 느릿느릿 걷다가 쉬고, 쉬다가 또 걷다보면 원당암, 홍제암, 용탑선원, 희랑대, 지족암, 백련암에 닿았다. 지족암 팔각정 다실에 홀로 앉아 오랫동안 비내리는 가야산을 내려다봤다. 일타스님이 차 마시던 곳이다. 이제는 차도로만 사람들이 다녀 낙엽만 수북히 쌓인 백련암 오솔길도 홀로 걸었다. 성철 스님이 걸어서 큰절을 오갔을 오솔길이었다.
맑은 물을 줄기차게 들이붓는 홍류동 계곡을 따라 늙어 허리가 휜 홍송이 빽빽했다. 암자 텃밭에는 고추와 채마들이 자라고 곳곳에 해바라기 나팔꽃 같은 꽃들이 예뻤다. 이곳에서 시끄러운 세상과의 거리는 아득했다. 며칠 사이에 나는 참 많이도 느리고 고요해졌다. 내가 꿈꾸던 휴가였다.
백련암 성철스님, 홍제암 자운스님, 원당암 혜암스님, 지족암 일타스님. 이분들은 '부처님 법대로 살자'며 '봉암사 결사'를 시작한 이래 함께 해인사를 지키며 치열한 자기정화와 이타행의 생을 펼쳐보인 지난 세기의 마지막 도인들이다.
'가야산 호랑이'로 불렸던 성철 스님은 환적대 신상봉 아래 백련암에서 '산은 산 물은 물'의 쩌렁쩌렁한 법어를 세상에 내려보내 불교의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 1993년 가을 나는 가야산을 가득 메웠던 성철 스님 다비식 인파 속에 섞여 장엄한 열반의 풍경을 지켜보았다.
'가야산 대쪽'으로 불린 원당암 혜암스님은 1994년과 98년 조계종 분규때 부처님의 바른 법을 수호하는 단호한 소신과 추상같은 의지로 종단을 지켜낸 불교계의 큰어른이기도 했다.
1999년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조계종 종정인 혜암 스님을 원당암 미소굴에서 만났었다. 스님은 "실패가 주먹만하면 성공이 주먹만하고 실패가 태산만하면 태산만한 성공을 얻을 수 있는 법"이라며 "세상에서 겪게 되는 난관이나 재앙을 불행이 아니라 큰 선물로 돌려라"라는 말씀을 주셨다. 자운스님과 일타 스님은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율사로 추앙 받았다. 이런 거인들을 생전에 뵐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홍복인가. 나는 가야산 자락에 곳곳에 서린 큰스님들의 수행일화를 소중하게 마음에 담았다.
짧지 않은 휴가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왔다. 기다렸다는 듯 소음과 싸움의 세상사가 달려들었다. 여전히 대통령은 불교계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었고, 20만명이나 되는 스님과 불자들은 서울시청 광장에 모여들어 범불교도대회를 열고 있었다.
"노자와 공자가 손을 잡고 석가와 예수가 발을 맞추어 뒷동산과 앞뜰에서 태평가를 합창하니 성인 악마가 사라지고 천당 지옥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장엄한 법당에는 아멘소리 진동하고 화려한 교회에는 염불소리 요란하니 검다, 희다 시비싸움은 꿈속의 꿈입니다."
성철스님이 토해낸 어느 해 신년법어는 종교화합을 염원하고 있다. 성철 스님의 말씀은 오늘 이 자리에서 더욱 유효하지 않은가. 또 어떤 스님이 나와 가야산 노장들의 전설을 이어갈까. 세상과 권력을 향해 추상같은 죽비를 내릴 또 다른 큰스님을 만나고 싶다.
이제 휴가는 끝났고, 나만의 고요는 깨졌다. 벌써 가야산 빗소리와 백련암 앞마당의 찬물이 그리워진다.
※<주간불교>에 썼던 글입니다.
해인사 백련암/경향신문 사진
가야산 해인사 전경/경향신문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