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여적]서소문 밖 성지(聖地)

김석종 2014. 11. 28. 15:32

 

[여적]서소문 밖 성지(聖地)

조선시대 서소문은 용산 마포와 의주를 통해 중국으로 나가는 한양의 중요한 관문이었다. 서소문 밖에는 칠패시장이 번성했다. ‘서소문 밖 만초천변 모래사장’은 새남터와 더불어 조정의 공식 처형장이었다. 특히 국사범(國事犯)을 능지처참해 그 목을 ‘서소문 밖 네거리’에 높다라니 효수하는 일이 많았다. 팔도 상인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서 입소문을 내 경각심을 높이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민생이 어지럽던 조선 후기에는 실학·서학·동학 등 새로운 사상·종교가 일어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민란도 끊이지 않았다. 1811년에는 민중 반란을 일으킨 홍경래 목이 서소문 밖 네거리에 걸렸다. 이곳은 천주교의 대표적인 순교성지이기도 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치명(斬首致命)을 당했다. 한국 교회의 성인 103위 중 44위, 복자 124위 중 27위가 서소문 순교자들이다. 지난 8월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에서 무릎을 꿇고 감동적인 기도를 올렸다.

이곳은 동학(천도교)에도 중요한 성지다. 1894년 갑오농민혁명을 일으킨 동학의 지도자 전봉준이 서소문 밖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2대 교주 최시형은 1898년 서소문 감옥에서 재판을 받은 뒤 순교했다. 동학 농민군의 3대 지도자 김개남이 전주에서 참형된 뒤 머리만 압송돼 효수된 곳이기도 하다. 1907년 일제의 군대 해산에 반대해 대한제국 군인들이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의병으로 활동한 것도 기억해야 한다.

지금은 서소문 근린공원이 돼 있는 서소문 밖의 슬픈 역사다. 그런데 이런 서소문공원이 요즘 종교 갈등의 중심에 섰다고 한다. 천주교가 이곳에 자신들의 순교성지를 만들기 위한 사업을 과도하게 밀어붙인 탓이다. 천도교를 중심으로 범국민대책위원회까지 꾸려져 천주교의 ‘땅뺏기’라고 반발하는 상황이다. 서학 천주교, 동학 천도교, 민족역사를 모두 아우르는 역사공원이 바람직한 해법이라고 본다. 정부와 서울시, 중구청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사업이 특정 종교에 치우치면 곤란하다. 서소문에서 종교 간 평화와 상생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다. 마침 올해가 천주교 전래 230주년, 동학농민운동 12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2014.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