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미생이 남긴 것
[여적]미생이 남긴 것
‘미생’이라는 바둑용어가 2014년 막바지에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케이블TV로는 유례없이 높은 시청률과 함께 ‘미생 신드롬’이란 말까지 만들어낸 드라마 <미생> 얘기다. “드라마가 끝나고 한참 있다가 눈물이 났다. 사는 것이 힘들다. (…) 나도 이 세상, 정말 죽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아까워 버텨본다.” 그제 드라마 종영과 함께 인터넷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는 이런 유의 댓글이 경쟁적으로 올라왔다.
<미생>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는 묵직한 주제로 시작했다. ‘비정규직’인 주인공 장그래를 중심으로 아직 완생이 되지 못한 미생들의 고군분투를 그렸다. 이 드라마가 특별한 것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데 있다. 청년세대의 취업난, 비정규직 차별, 실세를 향한 줄서기, 직장 내 여성비하, 워킹맘들의 어려움, 퇴직자의 고통 등 한국 사회의 그늘들을 속속들이 짚어낸 것이다. 장그래는 끝내 정규직이 되지 못했다. 권력과 불의에 굽히지 않으면서 후배들을 진심으로 감싸는 멋진 리더 오 차장도 결국 회사를 떠났다. 인물을 그리 중히 여기지 않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이런 것들은 대한민국이 미생의 나라라는 것을 보여준다. 미생은 ‘을(乙)’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땅콩 한 봉지 때문에 비행기에서 내린 승무원, 아파트 주민의 폭언 때문에 자살한 경비원, 정규직 전환 때문에 성추행을 당하다가 자살한 여성 등이 그런 사례다. 따라서 <미생>의 공감 코드는 판타지가 아닌 리얼리티가 됐다. 오 차장은 장그래에게 “버티라”고 끊임없이 주문한다. 자신 또한 회사에서 버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끝까지 참고 버텨야 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동질감과 위로로 다가왔다.
<미생>은 비주류 케이블TV 드라마라는 점에서도 돋보인다. 인기 공식이라는 삼각관계, 재벌 2세, 배신과 복수, 신분 상승 같은 왜곡된 관계가 전혀 없다. 극장가에서도 비주류 독립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흥행돌풍이다. 이제 시대정신이 변방과 비주류로 옮겨가는 것은 아닐까. <미생>에서 퇴직한 오 차장과 장그래의 희망에 찬 결말은 좀 아쉽다. 현실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은 여전히 척박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석종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