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여적]‘미생’ 신드롬

김석종 2014. 11. 28. 15:20

 [여적]‘미생’ 신드롬

 바둑판은 가로 세로 19줄, 전체가 361목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놓는 한 수에 따라 수많은 승패의 변수가 생겨난다. 그래서 바둑을 ‘인생의 축소판’이라고들 한다. 우리가 쓰는 말 중에도 바둑용어가 꽤 많다. 시간에 쫓기면 ‘초읽기에 몰린다’고 한다. 결정적인 실수는 ‘패착’, 실패가 뻔히 보이는 데도 고집을 피우면 ‘무리수’를 쓴다고 말한다. 국면, 사활, 꽃놀이패, 묘수, 정석, 꼼수, 자충수, 수읽기 등도 바둑에서 나왔다. ‘장기적 포석’ ‘혼미한 국면’ ‘장고 끝에 악수’ 등도 바둑용어를 차용한 표현이다. 바둑의 9단을 ‘입신’이라고 하는데 과거 김대중, 김영삼 등을 ‘정치 9단’이라고 했다.
 당나라 현종 때 바둑 최고수 왕적신은 <위기십결>을 남겼다. ‘바둑을 두는 10가지 비결’이라는 뜻이다. 부득탐승(승리를 탐하면 이기지 못한다), 공피고아(공격할 때는 나의 약점을 먼저 돌아보라), 사소취대(작은 것은 버리고 대세를 얻어라), 봉위수기(위기를 당하면 빨리 포기해서 손실을 줄여라), 세고취화(상대가 우세한 곳에서는 전투를 벌이지 마라), 피강자보(적이 강할 때는 자신을 보호하라) 등 바둑 뿐만 아니라 인생의 처세를 가르치는 십계명으로 통한다.
 바둑은 기본적으로는 싸움이고 전쟁이다. 따라서 바둑의 전략이 정치와 전쟁, 스포츠 등에 활용되는 사례가 흔하다. 요즘 윤태호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미생’이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화제라고 한다. ‘미생(未生)’은 바둑에서 ‘아직 완전히 살지 못한 집’을 말한다. 그 반대가 상대방이 어떤 수를 두어도 살 수 있는 ‘완생(完生)’이다. 미생은 완생을 지향한다.
 드라마는 고졸 학력의 종합상사 인턴사원이 겪는 직장생활을 바둑판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바둑판 직장은 말 그대로 사활을 건 전쟁터다. ‘비정규직 사원’인 주인공만 미생인 것도 아니다. 사원, 대리, 과장, 부장, 전무가 모두 미생들이다. 그들은 ‘중심’을 차지해 완생이 되기 위해 경쟁과 견제와 따돌림을 견딘다. 대한민국 젊은이의 불안한 현실, 직장인의 팍팍한 삶의 형국을 새삼 돌아보게 만드는 미생 신드롬이다. 이런 때 신물경속(빠르고 경솔하게 두는 것을 삼가라)의 바둑 격언이 답이 될까. 2014.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