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을 것인가.
죽음은 언젠가, 혹은 곧 닥칠 것이다. 요즘은 웰다잉이 중요한 화두가 되면서 죽음에 대한 스터디 모임까지 있다고 한다. 얼마 전 <내 삶은 완성하는 더 나은 죽음>(댄 모하임/노혜숙 옮김/아니마)을 읽었는데, 이번에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고 서평을 썼다.
[책과 삶]
무신론자에 찾아온 말기 식도암… 그가 마주한 죽음의 진실은?
▲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김승욱 옮김 | 알마 | 144쪽 | 1만1000원
인간은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다만 오랜 세월 동안 신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죽음이 과학과 의학의 영역으로 점점 넘어오고 있을 뿐이다. 최근 들어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죽음을 앞두고 ‘파스칼의 도박’(신을 믿으면 모든 것을 얻을 가능성이 있지만, 믿지 않았다가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철학자 파스칼의 이론)에 마음이 약해져 종교에 귀의하는 이들도 많다.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뛰어난 비평가이자 탁월한 논쟁가였던 영국 출신 논객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유작이다. 그의 이름은 최근의 영미권 지식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무신론자 혹은 반신론자, 그리고 세상의 모든 문제와 맞서 싸웠던 ‘우상파괴자’로서 우뚝하다.
히친스는 자신의 출세작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서 “신에게 베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무신론에서 <만들어진 신>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와 쌍벽을 이뤘다.
그런 대단한 무신론자에게도 예외없이 죽음은 찾아왔다. 말기 식도암을 진단받고 1년 정도 투병하다가 2011년 죽었다. 죽음은 그가 숙명적으로 마주친 생애 마지막 주제였다.
이 책은 그 투병의 기록이자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색의 결과물이다. 과연 그는 죽음을 어떻게 대하고 받아들였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히친스는 변함없는 무신론자로 생을 마쳤다. 그는 끝까지 신에게 기대지 않고 오직 죽음을 앞둔 인간으로서 죽음을 냉철하게 관찰했다.
그는 처음 진단 결과를 통보받은 후 느낀 당혹감부터 점차 파괴되는 몸, 그로 인한 지독한 고통과 상실감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는 여전히 단호하고 도발적이다. 그에게는 내세라는 피난처도 없다. 종교의 복잡한 거짓과 위선을 공격하던 송곳 같은 비판정신은 내용과 문장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럼에도 매일 다른 모습으로 찾아오는 ‘몸의 고통’은 그를 점차 지치게 만든다. 어떤 대목에선 심각한 상실감과 열패감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설탕이 물속에서 녹을 때처럼, 무기력 속에서 나도 녹아가는 것 같다.”
히친스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두 가지다. 먼저 죽음에 대한 의도적 무관심이다. 히친스는 죽음을 고뇌하지 않는 것, 죽음 이후를 불안해하지 않는 것 자체가 죽음에 관한 하나의 성숙한 태도라고 설명한다. 히친스는 육체의 고통을 호소할망정 단 한 번도 죽음이나 내세에 대해 갈등을 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삶을 향한 압도적인 긍정이다. 그는 죽음에 직면해 역설적으로 삶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눈뜬다. 존재가 상실되어 가는 만큼, 삶의 아름다움이 지극해진 것이다. 마치 불꽃이 그 절정에 도달할 때 가장 화려한 것처럼, 죽음은 일생의 피날레로 의미화된다. 물론 그는 슬픔과 무력감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통해 살아 있음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우는 것이다. 이것이 히친스가 마주한 죽음의 진실, 무신론자의 죽음관인 것 같다.
히친스의 이 마지막 저서는 미완의 메모 수십장으로 끝나고 말았다. 하긴, 천하의 히친스라도 죽음에 정답을 내놓을 순 없다.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것과 친해지라는 그의 말은 그저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오직 각자 끊임없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갈 뿐!
김석종 선임기자 sjkim@kyunghyang.com (※경향신문 3월 22일 기사)
이책보다 먼저 읽은 <…더 나은 죽음>은 의학적인 측면에서 죽음 준비에 대해 쓴 책이다. 우리 사회와 개인이 '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 괌심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저자는 존엄한 죽음에 대한 권리를 법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사전의료의향서' 쓰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책 부록으로 양식과 설명서가 들어있다. 생각해보면 무의미한 연명시술은 끔찍하다. 나도 곧 사전의료의향서를 쓸 생각이다.
죽음을 생각할 때 부러운 건 불교 선사들의 죽음이다. 불교에서는 몸뚱이는 사대(四大), 즉 흙(뼈와 살)과 물(피)과 불(체온)과 바람(호흡)에 불과하다고 본다. 육신을 그저 입었다 벗는 하나의 옷처럼 생각하는 수행이 깊은 선사들은 자신이 떠날 날짜와 시간까지 꼭 집어 말하고 그 시각 좌탈입망으로 쉽게 몸을 벗어버리기도 한다.
이런 얘기도 있다.
당나라 때 은봉 선사는 물구나무 서서(도화, 倒化) 입적했다. 은봉선사의 기이한 열반소식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런데 장례식을 올리려고 해도 시신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여동생이 은봉선사를 향해 힐책했다.
“오라버니! 이 무슨 짓입니까? 평생 기행만 하더니 열반에 들 때마저 이런 장난을 친단 말입니까. 이제 그만 하세요!”
그러자 은봉선사의 몸뚱이가 풀썩 쓰러졌다고 한다.
이번에 읽은 <신없이…> 기사에는 쓰지 않았지만 책에 죽음에 대한 고대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명언이 나온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왔을 때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긴, 죽음을 두고 유난 떨 것도 없다. 두려워할 일도 아니다. 그저 삶의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죽음에 대한 해답은 '삶'인 것 같다. 어쩌면 개개인 삶의 완성이 곧 죽음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을 거다. 그저 마음 고요히 죽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