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 이야기
히말라야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
푼힐 전망대에서 바라본 여명의 안나푸르나. 좌측부터 안나푸르나 주봉, 남봉, Ⅳ봉
오른쪽은 성봉 마차푸차레. /사진 전홍
“안나푸르나행은 생존의 문제다.” 소설가 정유정은 지난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에 도전했다. 장편소설 <28>을 출간하고 난 뒤였다. 새로 글 쓸 기운을 얻고 싶었단다. 한국 땅을 처음 떠나는 여행치고는 좀 난코스를 택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다. 17일간 안나푸르나를 한 바퀴 도는 ‘환상종주’에 나섰지만 어느새 갈 길을 잃고 빙빙 도는 ‘환상방황’이 돼버린다. “여기에 왜 왔는지, 기억해보려 해도 생각이 모이질 않았다”고 했다. 그는 종주 구간의 최고 난관인 쏘롱랑패스(5416m)를 넘는 동안 고소 증세를 겪으며 주문 외듯 묻는다. “나는 세상으로 돌아가 다시 내 인생을 상대할 수 있을까.” 어떤 목소리가 답했다고 한다. “죽는 날까지.” 그가 쓴 <히말라야 환상방황>에 나오는 얘기다.
네팔에서 10여년을 눌러살다 돌아온 시인 김홍성의 순례기 <히말라야, 40일간의 낮과 밤>에는 ‘푸른 룽다’라는 시가 들어있다. ‘…기다리는 그대가 있어/돌아오는 나도 있네/푸른 룽다 펄럭이는 날/바람처럼 돌아오네.’ 칼라 보노프의 노래 ‘더 워터 이즈 와이드(The water is wide)’에 김 시인이 가사를 붙여 부르던 노래란다. 룽다는 히말라야 소수민족들이 불경을 새겨 나무나 돌에 거는 깃발이다. 그는 “해발 5000m 가까이 가서 며칠 지내 보면 문득 저승 문지방을 밟는 느낌”이라고 했다.
히말라야는 ‘세계의 지붕’ 답게 8000m 이상 고봉이 14개나 된다. 이를 지상의 별로 쳐서 ‘히말라야 14좌(座)’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네팔 중부의 안나푸르나(8091m)는 1950년, 모리스 에르조그가 이끄는 프랑스 원정대가 처음 등정했다. 인류 최초의 8000m 이상 고봉 등정이었다. 에르조그는 처절한 사투와 ‘최악의 비박’ 끝에 하산했고, 손가락을 몽땅 잘라내야 했다. 정상에 오른 기쁨에 장갑 끼는 것조차 잊었던 것이다. 뒷날 프랑스 체육·청소년부 장관을 지낸 에르조그는 이 과정을 <처녀봉 안나푸르나 8000>이라는 책으로 썼다.
안나푸르나는 ‘풍요의 여신’이란 뜻과 달리 등정사고가 잦은 곳으로 유명하다. 2008년까지 등정자 164명, 등반중 사망자는 60명에 이른다. 한국 원정대는 지금까지 5명의 대원이 안나푸르나1봉에 도전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지현옥과 박영석이 안나푸르나 등정중 설산에 몸을 묻었다. 엄홍길은 동료와 셰르파를 잃고 네 차례 도전 끝에 등정에 성공했고, 오은선도 두 번 만에 올랐다.
반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히말라야 트레킹의 대명사다. 과거에는 전 세계 히피들이 누볐던 낭만적인 길이다. 지금도 전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 국내에서도 인기다. 네팔정부는 이곳에 대중적인 트레킹코스를 개발했다. 서부 무스탕 지역을 시계 방향, 혹은 반대 방향으로 도는 환상 코스다. 어느 쪽으로 가든 가장 높은 구간인 쏘롱라패스를 지나야 한다. 특히 1년 중 날씨가 가장 쾌청하고 설산 풍경이 장엄한 10~11월은 안나푸르나 트레킹과 하이킹의 적기로 꼽힌다. 이때는 모든 트레킹 길과 로지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이 무렵 로지에서 바라보는 마차푸차레의 일몰은 신비롭고 환상적이다.
그런데 최근 이례적으로 네팔 중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지역에 몰아친 대규모 폭설과 눈사태로 수십명이 숨지고 스백명이 실종됐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인도 동부를 강타한 대형 사이클론 ‘후드후드’의 영향으로 무려 4m까지 폭설이 쌓였단다. “최고의 등산은 살아 돌아오는 것”이란 말이 있다. 실종된 등산객들이 생환할 수 있도록 빠른 구조가 이뤄지길 기원한다. 김석종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