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대 '암벽여제' 김자인 이름에 얽힌 재미난 사연
[여적]암벽여제 김자인
암벽의 발레리나 김자인 /올댓스포츠 제공
바야흐로 단풍 산행 절정기다. 하지만 이럴 때 진짜 산꾼들은 바위에 ‘붙는다’. 요즘 북한산에 가면 자일에 의지해 인수봉 암벽에 개미떼처럼 매달린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암벽등반(록클라이밍)이야말로 등산의 꽃이라고 말한다. 수직으로 솟아오른 암벽에서 추락의 위험을 이겨내는 스릴은 최고라고 한다.
암벽등반은 1760년대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에 도전한 것을 시초로 여긴다. 유럽에서는 1800년대 중반 알프스 산맥을 중심으로 암벽 등반의 황금기를 맞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등반 기술과 장비의 획기적 발전으로 악명 높은 암벽들이 하나하나 정복됐다. 1950년대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요세미티 계곡에서 등산장비 없이 맨몸으로 암벽을 오르는 ‘프리 클라이밍(자유등반)’이 등장했다.
산과 계곡이 많은 우리나라는 암벽의 천국이기도 하다. 김용기가 쓴 <한국암장순례>에는 전국 43개산 233개 암장에 모두 2556개에 이르는 바윗길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북한산, 도봉산, 설악산, 대둔산, 월출산, 선운산, 용화산은 암벽 명산으로도 유명하다. 암벽에는 등반코스를 처음 개척한 산악회 이름이나 암벽의 특징에 따라 명칭이 붙어 있다.
북한산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가 긴 세월에 걸쳐서 갈고 다듬어진 산이다. 그중에서도 미끈하게 잘 생긴 바위 덩어리인 인수봉은 우리나라 암벽등반의 메카로 불린다. 인수봉에는 여명길, 빌라길, 패시길, 동양길, 크로니길, 하늘길 등 정규 루트만 80여개가 있다. 도봉산 선인봉에도 요델길, 허리길, 박쥐길, 표범길, 총각길 등 40개가 넘는 암벽 루트가 있다. 설악산 별따는 소년 코스와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은 이름과 달리 난도가 아주 높은 암벽이다.
도봉산 선인봉의 동쪽면에 있는 암벽등반 코스인 총각길은 가슴 아픔 사연이 담겨 있다. 총각길은 대학생인 김종철·이만수·오준보씨가 1960년대 후반 개척했다고 한다. 이들은 1969년 겨울 한국산악회의 히말라야 원정 훈련대원으로 선발돼 설악산 동계 등반훈련을 갔다. 그 등반에서 세사람은 다른 일곱명의 동료와 함께 눈사태를 만나 영원한 총각의 몸으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당시 사고가 난 계곡을 ‘죽음의 계곡’, 설악산 들목인 노루목에 있는 산악인 묘지를 ‘십동지묘’라고 부른다.
한국은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자 기록에서 1등을 달리고 있다. 전세계 14좌 완등자 30여명 가운데 엄홍길, 고 박영석, 한왕용, 김재수, 오은선, 김창호 등 6명이 14좌를 모두 밟았다. 한국이 이처럼 등산 강국이 된 것도 훌륭한 겔린더(암벽 훈련장)에서 목숨을 걸고 훈련한 산악 선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과거 산악인들 사이에 등산장비나 산의 이름을 따서 자녀 이름을 짓는 일이 유행했다. 자일, 비나(카라비너), 낭가(낭가파르바트), 안나(안나푸르나), 난다(난다데비), 초오유 등이 산꾼들의 아들딸 이름이다. ‘암벽여제’, ‘암벽의 발레리나’로 불리는 신세대 클라이밍 스타 김자인도 그런 경우다. 산악인 출신인 부모가 등산장비인 자일과 인수봉에서 한 자씩 따 자인이란 이름을 지었다. 큰오빠 자하는 자일과 하켄(암벽에 박는 쇠못), 작은오빠 자비는 자일과 카라비너(로프 연결용 금속 고리)에서 차용했다고 한다.
그 김자인이 이번에 국제스포츠클라이밍 아시아선수권대회 난이도(리드) 종목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로써 김자인은 아시아대회 10번째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한 달 전 스페인 세계선수권대회 한국인 첫 우승에 이은 또 한 번의 쾌거다. ‘등반 강국’ 한국에 또 하나의 값진 기록을 보탠 것이다. 험한 산, 아득한 절벽을 잘도 오르는 한국인의 빼어난 실력이 사방이 아슬아슬한 절벽인 정치와 경제에서도 발휘될 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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