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촌, 조선땅 천주교 첫미사 성지 가회동성당
박해시대 천주교 지도자들이 숨어살던 북촌 심처
'한국 천주교 모교회' 가회동성당의 스토리텔링
중국인 주문모 신부(1752~1801)는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사제다. 주 신부는 1795년 4월5일 부활대축일에 서울 ‘북촌 심처’에 있던 최인길의 집에서 정약종, 황사영 등 초기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조선 땅 첫 미사를 드렸다.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같은 동네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해 무려 6년을 숨어지내며 전교활동을 했다. 주 신부를 포함해 북촌 일대에서 활동한 초기 조선천주교 지도자들은 대부분 신유박해(1801년)를 전후해 순교했다. 서울지역에서는 당시의 순교자들이 오는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시복식을 통해 복자(성인의 전 단계)에 오르게 된다.
서울 종로구의 가회동성당은 이처럼 한국천주교사에서 중요한 북촌지역을 관할한다. 1949년 처음 세워진 낡은 건물을 허물고 지난해 말 새 성당을 준공했다. 연면적 3738.34㎡, 지하 3층·지상 3층 규모로 한옥과 양옥이 어우러진 구조가 눈길을 끈다. 송차선 주임신부(54)가 지난 2년여에 걸쳐 성당 재건축을 총지휘했다. 그는 건축가 출신 사제라는 특이한 이력 때문에 적임자로 지목됐다고 한다.
송 신부는 “가회동성당은 어디나 있는 평범한 성당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첫 미사를 드린 초대 교회의 사적지이자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승리를 입증한 순교자들의 영성을 상징하는 본당”이라며 “그런 정신을 담기 위해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 입은 조선의 선비와 벽안의 외국인 사제가 나란히 어깨동무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한옥과 성당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꾸몄다”고 말했다.
▲ 중국 신부가 조선 최초 미사… 6년간 은신하며 선교한 지역
복음의 씨앗 떨어졌던 땅에 역사와 순교 정신을 담아서
건축가 사제가 새 성전 지어
가회동성당은 외부에서 보면 성당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 도로 쪽에 나지막한 한옥을 배치하고 그 안에 덩치 큰 성전과 사제관 양옥을 숨겨두었다. 배롱나무와 돌담을 돌아 계단을 올라가면 비로소 성당 건물을 만난다. 또 건물의 상당 부분을 지하에 묻었다. 옛 성당 건물에 있던 십자가도 길가에서 한참 들여 지은 사제관의 꼭대기에 자그맣게 세웠다. 송 신부는 “박해시대 숨어서 예배하던 천주교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년 전 이곳에서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주 신부에게 세례받은 신자가 수천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북촌에 숨어든 신자들이 곳곳에 원시적인 수도원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신앙과 희생으로 한국천주교회를 지켜냈습니다.”
조선땅 첫 미사 성지를 관할하는 가회동성당 성모자상 앞에 선 송차선 신부. 건축가
출신 사제인 그는 성당 건물 곳곳에 박해시대 천주교의 모습을 반영했다.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송 신부는 “당시는 주 신부가 머무는 곳이 성당 겸 천주교 활동의 중심이었다”며 “그런 역사와 순교정신을 이어받은 가회동성당은 ‘한국천주교의 모교회’인 셈”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성당 1층에 마련된 역사전시실은 한국천주교회와 가회동성당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료로 채워져 있다. 1800년대 ‘천주실의’ 원본, 왕의 천주교도 체포령인 ‘척사윤음’, 기해박해(1839년) 때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한글로 기록한 ‘기해일기’, 로마에 소장돼 있는 원본을 영인한 ‘황사영 백서’ 등 희귀한 천주교 자료들이 눈길을 끈다. 이런 유물과 자료를 설명하는 글씨가 독특했다.
“기해일기는 천주교 박해를 기록한 슬픈 내용입니다. 그러나 세필로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한글 글씨체는 아름답지요. 그 글씨체를 토대로 만든 글자가 가회체입니다. 간판과 안내판 등 성당의 모든 글자를 순교자의 얼이 배어 있는 가회체로 쓰고 있습니다.”
한옥 지붕의 암·수막새 기와엔 ‘오병이어(五餠二魚)’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문양을 넣었다. 한옥의 큰방에는 첫 미사 모습을, 작은방에는 강완숙의 집에서 숨어지내던 주 신부 모습을 전통인형으로 재현했다. 우리나라 전통인형 작가가 옛날 복식과 생활사 등 고증해 제작했다고 한다.
가회동성당은 서울대교구 내 성지 23곳을 엮은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 제2코스의 출발지다. 요즘에는 천주교 신자와 북촌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 그리고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까지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지난달 31일 성당을 찾았을 때는 염수정 추기경이 이끄는 ‘교황 방한 및 순교자 124위 시복 기념 도보성지순례단’을 만났다.
송 신부는 성당 건너편 500m쯤 떨어진 곳에 남아 있는 석정보름우물(계동길 110)도 중요한 천주교 유적으로 꼽는다. 주 신부가 미사와 세례 때 성수로 썼다는 우물이다. 송 신부는 “천주교 박해로 많은 순교자가 생기자 한동안 물에서 쓴맛이 나서 사람들이 먹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며 “지금은 우물이 폐쇄됐지만 한국천주교 최초의 성수라는 역사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 북촌 가회동 주택가에 있는 유서깊은 석정보름우물. 주문모 신부는 이 샘물을 몰래 길어다 미사와 세례의 성수로 썼다고 한다. 천주교 박해로 많은 순교자가 생기자 물에서 쓴 맛이 나서 사람들이 먹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은 폐정된 우물을 겉모습만 복원했다.
“조선 땅 첫 미사에 참석한 인물 중 주문모, 최인길, 정약종, 윤유일, 지황, 최창현, 김종교가 이번 교황 방한 때 복자가 되십니다. 주 신부를 숨겨준 강완숙과 그의 아들 홍필주도 복자품에 오릅니다. 이번에 시복되는 ‘하느님의 종’ 124명 중 20여명이 북촌을 본거지로 활동했습니다. 전국의 초기 천주교 지도자들이 대부분 국내 유일한 사제인 주 신부를 찾아와 몰래 미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김대건 성인도 이곳에서 미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송 신부는 “북촌은 박해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신앙의 꽃을 피운 기적의 땅”이라며 “앞으로 더 많은 역사자료를 찾아내 한국천주교의 초기 역사와 순교자들의 신앙생활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의친왕 이강 부부도 가회동성당서 세례
성당엔 당시 경향신문 지면

서울 가회동성당 1층 역사자료실에는 1955년 8월18일자 경향신문 기사가 액자에 담겨 걸려 있다(사진). ‘쓸쓸히 일생을 마친 이강공’이란 제목의 기사는 의친왕 이강(세례명 비오, 1877~1955)이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 가회동성당 주임사제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임종 이틀 전에 의친왕비 김숙도 가회동성당에서 마리아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전한다.
“…그는 입교 동기로서 자기의 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이조 최근사를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사람으로 속죄하고 싶었다는 것과 그렇게 무자비하게 천주교를 믿는 자를 처단했어도 웃음으로 목숨을 내놓았고 그후 날로 천주교 세력이 번성해가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들었다 하는데….”
의친왕은 흥선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다. 가회동성당 관계자는 의친왕의 세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국립중앙도서관을 뒤져 경향신문을 찾아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성당 세례문서를 통해 확인과정을 거쳤다. 대원군은 1866년 병인박해 과정에서 12명의 프랑스 선교사 가운데 9명과 수천명의 신자들을 순교시키는 등 한국교회사상 가장 가혹한 박해를 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의 부인과 손자, 손자며느리 등 가족들이 천주교 신자가 됐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역사의 아이러니다.
송차선 신부는 “천주교를 박해한 조선 왕실의 후손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신앙이 승리한 것을 보여주는 자료”라며 “이들의 천주교 입교로 가회동성당은 천주교 박해와 화해의 상징이 됐다”고 말했다.
※2014년 6월6일자 경향신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