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종이 만난 사람

공연계 ‘미다스의 손’ 박명성

김석종 2010. 11. 27. 13:53

ㆍ“흥행콘텐츠 바탕 꿈과 감동 주는 연극·창작뮤지컬 전념”

‘신시컴퍼니’ 박명성 대표(48)는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다. “뮤지컬 프로듀서는 꿈 꾸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먼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생략과 비유의 어법, 극적인 표정과 제스처도 ‘연극적’이었다. 마치 무대에 선 배우가 대사를 하는 것처럼.

서울의 대표적인 도심사찰인 양재동 구룡사 경내에 있는 신시컴퍼니 사무실. 20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극단 신시의 김상열 대표를 만났던 바로 그 자리에서 박 대표를 만났다. 그는 김 대표의 뒤를 이어 극단 신시를 맡았고, 지난 10년 동안 국내 뮤지컬산업의 르네상스를 이끌면서 공연계의 ‘미다스의 손’이 됐다.


신시컴퍼니 박명성 대표는 <맘마미아> <아이다> 같은 대작 뮤지컬의 흥행수입을 바탕으로 ‘정통 연극’과 ‘창작뮤지컬’ 제작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했다.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80년대 말이면 제가 조연출과 기획일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해남 촌놈이 연극배우의 꿈을 안고 상경했지만 모든 것이 쉽지 않았어요. 연극배우는 끝내 가지 못한 길이 됐지요. 그 아쉬움이 결국 기획자라는 새로운 길을 찾은 계기가 됐습니다.”

억제된 격렬함을 보여주는 연극배우처럼 그가 또 말했다. 단구에 호리호리한 몸매, 짧게 깎은 머리와 날카로운 눈빛 등 전체적으로 아주 단단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인상만큼이나 강한 집념과 에너지로 <더 라이프> <갬블러> <렌트> <맘마미아> <시카고> <아이다> 등등 숱한 ‘메이드 인 박명성’의 초대형 뮤지컬들을 제작해왔다.

그가 이번에는 5년 전 초연됐던 <아이다>(12월18일부터 성남아트센터)를 무대에 올린다고 한다. ‘남자의 자격’에서 뛰어난 리더십과 카리스마로 합창단을 이끌어 화제가 된 박칼린이 음악감독뿐 아니라 연출까지 맡는다. 두 사람은 한국 뮤지컬계에서 소문난 ‘실과 바늘’이다.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그는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박칼린에게 나는 오빠이면서 멘토라고 보면 된다. 밤늦게라도 서로 개인적인 고민을 다 털어놓는 사이다. 처음 만났을 때 박칼린은 한국을 떠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내가 <시카고>의 음악감독을 제안하면서 눌러앉혔다. 그후 배우 오디션부터 캐스팅, 연습까지 음악에 대한 모든 권한을 그에게 주고 있다.”


- 뮤지컬계에서 박칼린은 어떤 존재인가.

“박칼린은 배우들의 숨은 재능과 소리를 끌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조승우, 최재림, 박준면, 김선영, 옥주현, 정선아 같은 훌륭한 배우들을 발굴하고 키워내지 않았나.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폭넓은 문화적 감각도 갖고 있다. 박칼린을 연출자로 데뷔시키는 모험을 한 것도 나다.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 <퀴즈쇼> <틱틱붐>을 연출했다. 그런 신뢰감이 우리 두 박씨를 의기투합하게 했다. 한국 문화계의 보물인 박칼린을 내가 키웠다. 하하하하.”

- 그렇더라도 이런 초대형 무대 연출은 모험이 아닌가.

“박칼린도 나도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모험을 믿는다. 오늘도 연습장에 다녀왔다. 박칼린은 요즘 스태프들과 마지막 호흡을 맞추느라 새벽부터 밤까지 강행군 중이다. 얼마나 열심히 준비를 했는지 한 신 한 신이 소름끼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방송의 예능프로그램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박칼린의 진면목과 함께 전혀 새로운 뮤지컬의 앙상블과 크레디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박칼린 <아이다>의 특징은 무엇인가.

“무대 메커니즘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 될 것이다. 브로드웨이에서 오리지널 무대장치를 가져오는데만 30억원이 들었다. 캐스팅도 모험적이다. 옥주현·정선아·김우형 등 모든 출연진이 원캐스트(1역 1인)로 나서 무대를 책임진다. 요즘 더블(2명), 트리플(3명), 심지어 쿼드러플(4명) 캐스팅까지 하는 추세에 역행하는 시도다. 그렇지만 이것이 공연의 정도다. 그래야 밀도 높은 공연을 보여줄 수 있다. 더블 캐스팅은 우리나라에만 있다. 아이다의 성패는 대한민국 뮤지컬 미래에 대한 척도가 될 거다. 이번 무대는 초연보다 훨씬 완성도가 높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 주연을 맡은 배우 옥주현은 어떤가.

“<아이다>는 옥주현의 뮤지컬 데뷔작이었다. 그때도 하루에 열 시간씩 혹독한 훈련을 견뎌냈다. 그만큼 인내와 끈기, 열정이 있는 노력파 배우다. 현재 국내에 옥주현만큼 파워풀한 가창력을 가진 여배우는 몇명 되지 않는다. 연예인들을 무대에 세우는 스타마케팅과는 다르다. 내가 그의 가능성과 재능을 발견해냈다는 것이 행복하다.”

- 박명성의 리더십은 어떤가.

“박칼린과 나는 비슷한 점이 참 많다. 항상 도전하고 모험하기를 즐긴다. 새로운 인재를 키우는 일에 자부심과 쾌감을 느낀다. 제작자인 내가 뚝심이 있고 통이 좀 더 크다고 해야 하나? 뮤지컬 제작자는 리더십과 카리스마 없이는 할 수 없다. 나는 의리를 중시하고, 사람을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다. 우리 조직을 ‘신시 특공대’라고 부른다. 팀워크에서는 강하고, 개인적으로는 한없이 자유롭고 부드러운 조직이다. 내가 특공대장이다. 나는 인생이든 연극이든 열정과 진정성을 중시한다.”

뉴욕의 브로드웨이와 런던 웨스트엔드 뮤지컬계에서 붙여준 그의 별명은 ‘브로드웨이 박’이다. 강한 추진력 때문에 ‘불도저’로도 불린다. 그는 문화계 마당발이기도 하다. 숱한 대작들을 성공시킨 배경에는 지난 10년 동안 쌓아온 인맥이 큰 힘이 됐다. 젊은날부터 동고동락해온 김갑수, 남경주, 허준호, 최정원, 이태원, 이건명, 전수경, 성기윤 같은 배우들도 그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 한국 공연문화에 끼친 가장 큰 공로가 무엇인가.

“쑥스럽지만 한국 공연문화의 트렌드를 바꾸었다는 자부심이 있다. 우리나라가 전에는 외국에서 오래된 뮤지컬을 도둑질해서 공연했다. 내가 최초로 해외 오리지널 뮤지컬을 정식으로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들여왔다. 런던과 뉴욕에서 이루어지는 공연들을 서울에서 동시에 볼 수 있게 됐다. 뮤지컬을 대중화하고, 시장을 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대를 잊고 살던 중년 관객들을 불러모았고,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 뮤지컬로 돈은 얼마나 벌었나.

“흥행 콘텐츠가 있기 때문에 재투자의 여력이 있는 정도다. 그렇지만 돈보다는 관객들에게 꿈과 감동을 주는 것이 목적이다. 돈벌이 때문이라면 사업을 하는 게 훨씬 낫다. 뮤지컬을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 설익은 작품들이 남발되면서 뮤지컬계의 위기가 왔다.”

- 그래서 “더 이상 해외 라이선스 뮤지컬을 들여오지 않겠다”고 선언했나.

“충격적으로 들리겠지만 어떤 점에서는 서울은 뮤지컬의 하수구가 돼버렸다. 10년 동안 뮤지컬계는 전성기였다. 지금은 시장의 규모에 비해 작품 수가 너무 많다. 뮤지컬 수입을 둘러싼 경쟁으로 너무 많은 로열티와 선급금을 지불하고 있다. 이제 뮤지컬에 대한 투자는 도박이 돼버렸다. 장인정신을 회복하고, 기본으로 돌아가겠다는 거다.”

- 그 기본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연극을 시작하던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순수기초예술에 투자를 하겠다. 소극장용이 아니라 중·대극장 무대, 검증된 연출진과 배우, 한달 이상 장기 공연으로 브랜드 파워가 생길 수 있는 공연을 만들 계획이다. 대형 뮤지컬을 해온 신시의 조직력, 노하우, 자본을 연극과 순수 창작뮤지컬에 투자해 공연문화의 하수구를 깨끗한 물로 확 바꾸겠다.”

뮤지컬 <아이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어떤 연극과 창작뮤지컬을 준비하고 있나.

“작년과 올해 연극 <가을소나타> <대학살의 신> <피카소의 여인들> <피아프>를 공연했다. 지금은 연극 <33개의 변주곡> <엄마를 부탁해>를 무대에 올리고 있다. 액수가 크지는 않지만 흑자를 냈다. 중·대극장 연극도 충분히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또 국극인 임춘앵의 일대기를 담은 <춘앵전> 등 새로운 뮤지컬을 준비하고 있다. 창작뮤지컬은 내년부터 한 해에 한작품씩 무대에 올리려고 한다.”

- 침체된 연극계에 새로운 활로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연극은 빈약한 자본력 때문에 우수한 연출가·작가·배우를 키우지 못했다. 요즘은 제대로 된 조연출도 찾기 어렵다. 작품 몇편 따라다니고 바로 연출을 한다. 젊은 세대들의 소극장 실험무대가 필요하다. 저돌적으로, 실험적으로 작품을 만들고 기초를 다지는 무대를 거쳐야 한다. 그런 경험이 바탕이 된 중견 연출자들이 중·대극장 무대를 담당하면서 대가가 되는 것이다. 연극이 계속 ‘가난한 예술’에 머문다면 희망이 없다. 대형 흥행작들이 많이 나오고 연극인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선순환 구조다. 메이저 제작사인 신시컴퍼니가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다.”

- 뮤지컬 프로듀서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

“한 작품을 운영하고 한 회사를 경영하는 총체적인 디자이너다. 기획에서 쫑파티까지 책임져야 한다. 모든 스태프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앙상블의 미학이 필요하다. 무대라는 환상과 흥행이라는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존재다. 배우들처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아니다. 객석 제일 뒤편에서 공연을 보면서 항상 마음 졸인다. 실패하면 그 모든 책임을 혼자 져야 한다. 나는 그런 긴장을 즐기는 편이다.”

- 공연 프로듀서의 성공 조건은 무엇인가.

“10년 전 내가 시작할 때는 직업 자체가 없었다. 1세대가 개척할 수밖에 없다. 길없는 산에 길을 내고 올라가면서 하나하나 표지판을 세웠다. 내 경험으로는 예술적인 소양과 경영능력이 함께 필요하다. 시대의 트렌드를 빨리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열정과 모험정신, 도덕성이 필요하다.”

- 가장 큰 보람을 느꼈을 때는 언제인가.

“<맘마미아> 개막 공연에서 중년의 관객들이 일어나 함께 춤추고 노래할 때였다. 내가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방화범이 됐구나 하는 성취감을 느꼈다. 무대 뒤편에 숨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도 관객들이 나는 앞으로 무얼 해야 될까,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숙제를 안고 가는 진지한 작품을 할 것이다.”

- 인생의 스승을 꼽는다면?

“인생과 연극을 가르쳐준 스승이 세 분 있는데 모두 돌아가셨다. 나를 연극의 길로 이끈 <산불>을 쓰신 차범석 선생님에게 나는 ‘양아들’이었다. 그분께 연극의 본질과 정신을 배웠다. 대학시절 무용의 스승인 최현 선생님께는 예술가의 멋과 흥을 배웠다. 극단 신시를 창단한 김상열 선생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10년을 모셨다. 그 분의 혹독한 훈육을 통해 맷집과 끈기를 키웠다.”

- 공연과 관련한 조언을 해주는 문화계 인사들은 누구인가.

“구룡사를 창건했고 지금은 경남 양산 통도사 주지인 정우 스님은 종교인인데도 연극에 대한 애정이 깊다. 87년 구룡사 안에 신시의 사무실과 소극장을 내준 스님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신시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다. 임영웅 선생, 손진책 선생, 윤호진 선생, 김수용 감독 같은 분들에게도 많은 조언을 구한다. 역시 어른들은 선지식이다. 어른들의 경험에서 배우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미래를 찾아가야 지름길이라는 것은 변함없는 이치인 것 같다.”

- <산불>을 원작으로 한 창작뮤지컬 <댄싱 새도우>는 왜 실패했나.

“고등학생 때 처음 본 연극 <산불>은 내 꿈의 씨앗이다. 뮤지컬은 세계시장을 겨냥해 7년 동안 준비하고 만들었다. 세계적인 거장들을 영입해 연출, 무대, 음악, 의상을 맡겼다. 의욕이 지나쳐서 원작이 지닌 한국적 정서나 색깔을 살리지 못했다. 결국 25억원의 손해를 봤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절대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연을 끝내면서 무대 세트를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그동안의 작업에 대해 반성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기 위한 결의였다. 소중한 경험을 쌓았고,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반드시 <산불>에 다시 도전할 것이다. 실패해도 또 도전하는 것, 그것이 나의 ‘뮤지컬 드림’이다.”

그는 스스로 해남 땅끝마을 ‘촌놈’이라고 말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5시에 일어나서 2시간 동안 농사일을 거들고 학교에 갔다. 그런 어린 시절과 연극판에서의 몸부림이 있었기에 누구보다 탄탄한 맷집을 키웠다고 한다. 지금도 폭탄주를 30잔까지 먹고도 5시30분이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고 했다.

인터뷰 중간에 옮긴 술자리는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뜨겁고 열정적이었다. “좋은 작품은 관객이 절대 외면하지 않는다”며 “반드시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창작뮤지컬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가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키는 남다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인터뷰를 마친 다음날 박칼린의 에세이집 <그냥>이 출간됐다. 박칼린은 박 대표에 대해 ‘삶의 계기가 되어준 귀인’ ‘철저하게 스태프를 믿는 프로듀서’ ‘무대를 정말로 사랑하는 남자’라고 썼다.)


■ 박명성은 누구 - 국내 뮤지컬산업의 르네상스 이끌어

196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광주 서석고, 서울예대 무용과, 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를 마쳤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본 연극작품 <산불>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가슴을 졸이며 연극에 빠져들었고,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대학로 연극판에서 단역배우 생활을 했다. 고 김상열 선생이 창단한 극단 ‘신시’의 창단멤버였지만 정작 배우로는 빛을 보지 못했다. 배우의 꿈을 접고 10여년간 조연출 생활을 했다. 공연 전단지 작업부터 음향, 무대, 조명 등 온갖 일을 경험했다.

그러나 첫 연출작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꿈을 접지 못하고 공연 프로듀서의 길을 택했다. 브로드웨이의 최신작 <더 라이프>의 저작권 계약을 따내면서 국내 라이선스 뮤지컬 시대를 열었다. 공연도 성공적이었다. 김상열 대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1999년 극단 신시의 대표가 됐다.

극단 이름을 신시뮤지컬컴퍼니로 바꾸고 뮤지컬에 집중했다. 그러나 대표가 된 후 올린 첫 작품 <갬블러>는 실패로 끝났다. 7억원의 손실을 보고, 연수를 핑계로 미국으로 떠났다. <갬블러>는 나중에 일본에 진출해 효자 노릇을 했다.

2005년 <아이다> 초연을 앞두고 위암 진단을 받았다. 런던 출장을 핑계 대고 몰래 수술을 받았다. 그가 제작한 뮤지컬 대작들이 대부분 성공을 거두면서 국내를 대표하는 뮤지컬 제작자가 됐다. 최근 연극과 창작뮤지컬 제작을 위해 회사 이름을 신시뮤지컬컴퍼니에서 신시컴퍼니로 바꿨다.

2001년 올해의 젊은 예술가상, 2002년 한국 뮤지컬대상 특별상, 2003년 한국 뮤지컬대상 프로듀서상, 2004년 대한민국 국회대상을 받았다. 서울연극협회장과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장을 지냈다. 뮤지컬 현장에서 기록한 제작노트를 다듬어 지난해 <뮤지컬 드림>을 출간했다. 지난달 14일 제42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통령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