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보

“누구나 자기 앞의 에베레스트를 오른다.” ‘국민 등반대장’ 엄홍길

김석종 2014. 12. 31. 15:42

  [김석종의 만인보]
  “누구나 자기 앞의 에베레스트를 오른다.”

  -히말라야 16좌 이어 ‘인생 17좌’ 오르는 ‘국민 등반대장’ 엄홍길

 

 

 

엄홍길(54)에게 바짝 군기 잡힌 적이 있다. 10년 전쯤 엄홍길과 겨울 한라산 등반을 했을 때다. 제주도 푸른 밤을 술로 지새운 터라 금세 헉헉댔다. 물론 엄홍길은 쌩쌩 ‘날아’다니며 일행을 챙겼다. 정상에 올라보니 몸이 휘청거릴 만큼 칼바람이 세차고 매서웠다. 너무 추워 혼자 내려와버렸다. 엄홍길이 불같이 화를 냈다. “형, 사고난 줄 알았잖아!” 산에서는 그렇게 예민한 엄홍길이다. 히말라야 설산에서 늘 순간에 생사가 갈리는 ‘최악의 경우’를 겪은 탓일 거다.

 

미당 서정주 선생은 말년에 매일 아침 세계의 명산 이름을 줄줄 외웠다고 한다. 엄홍길은 노시인이 그리워하던 세계 최고봉, 히말라야 8000m 이상 14개 봉우리를 죄다 올라갔다(아시아 최초, 세계 여덟번째다). 내쳐 남들이 가지 않는 2개 봉우리를 더 올라 세계 최초 16좌를 등정했다. 여태까지 한국인이 도달한 최고 높이다. 통틀어 22년이 걸렸다. 이 땅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엄홍길 신화’가 그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이 비범한 ‘성공’이 거저 이뤄졌을 리 없다. 히말라야 ‘영봉(靈峯)'은 인간 한계를 벗어난 신의 영역이다. 총 38번 도전에 18번이나 실패했다. 절반 밖에 되지 않은 도박이다. 세계 최고봉 안나푸르나는 다섯 번 만에, 캉첸중가는 세 번 만에 해냈다. 실패는 거의 죽음을 뜻한다. 후배 6명과 셰르파 4명을 잃었다. 엄홍길도 여러 번 죽다 살았다. 발목이 돌아간 상태로 3일 동안 기어서 내려왔고, 동상으로 엄지발가락도 잘라냈다.

 

엄홍길과 알고 지낸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새카만 얼굴로 원정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의 ‘히말라야 오딧세이’를 생생하게 들었다. 설산에 동료를 묻고 왔을 때는 술에 취해 울었다.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이란 노래를 부르고, 그 이름들을 주문처럼 외우곤 했다. 술딤도루지, 박병태, 지현옥, 나티, 카미도루지, 한도규, 현명근, 다와마탕, 박주훈, 황선덕. 그런데 그게 또 얼마 못 갔다. 히말라야의 ‘별’이 된 동료들이 부른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새 베이스캠프에서 엽서가 날아오는 거였다. 그렇게 오르고 또 올랐다.

 

왜 그렇게 ‘높이’에 목숨을 거나. 왜 그렇게 산에 미쳤나. “그냥 좋아서.” 고수라면 이렇게 단순명쾌해야 옳다. 씨나락 까먹는 말로 친절을 베푸는 건 도저한 대가의 태도가 아니다. 하긴 산악인들이 최고의 ‘법어’로 치는 말로리의 등산론도 “산이 거기 있으니까”였다. 엄홍길은 한마디 덧붙이긴 했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슬픔’ 때문에 간다”고. 그 슬픔은 친형제 같았던 후배 박무택의 죽음으로 절정을 이룬다. 엄홍길은 세계 등반 사상 전무후무한 ‘휴먼 원정대’를 조직해 히말라야로 갔다. 77일에 걸친 사투 끝에 8750m 빙벽 대롱대롱 매달린 시신을 수습해 양지바른 곳에 묻어줬다. 영화계가 또 이런 빅스토리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이번에 휴먼 원정대 실화를 바탕으로 <히말라야>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한동안 산보다 술을 더 좋아하는 엄홍길 친구들, 그리고 엄홍길을 따르는 남녀노소 무리들과 산행 모임을 만들어 내가 ‘회장’을 했다. 이 모임에 엄홍길 말고도 세계적인 여성산악인 오은선까지 가세했다(이 정도면 굉장한 자랑거리 아니겠나). 이 모임의 북한산행 출발점이 의정부 망월사역 뒤 ‘엄홍길기념관’이다(엄홍길 고향인 경남 고성에도 기념관이 있다).

 

여기서 망월사~포대능선을 오르는 원도봉산 코스를 주로 탔다. 등산로 초입에 엄홍길이 세 살 때부터 마흔 넘어까지 살았던 ‘엄홍길 집터’가 있다. 도봉산은 엄홍길의 ‘모산(母山)이다. 도봉산이 그를 키웠다. 부모는 계곡 중턱에서 등산객들을 상대로 매점을 하면서 음식을 팔았단다. 호롱불을 켜고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며 살았다. ‘야생’의 엄홍길은 ‘도봉산 타잔’이었다. 도봉산 약초 썩은 물이 식수이고 세숫물이었다. 등산로가 곧 그의 통학길이었다. 등산객을 따라다니며 바위를 타보다가 그예 ‘직업 산악인’으로 꿈을 굳혔다. 그러니 북한산·도봉산의 구석구석을 손금 보듯이 훤히 안다. 고교 졸업 후 설악산에서 살며 국내 산을 섭렵했다. 군 복무는 해군 특수부대(UDT)에서 마쳤다. 추진력, 테크닉, 파워, 카리스마 등 종합등반력에서 그가 일찌감치 압도적인 두각을 나타낸 게 그런 ‘태생적 산꾼’의 기운이라고 본다.

 

 

 

 

사실 산악인들 사이에 ‘상업등반’ 운운하며 엄홍길의 ‘탐험’을 삐뚜름하게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엄홍길을 필두로 한 히말라야 원정대가 국내 등산인구를 폭발적으로 늘리는 데 일조한 건 부인할 수 없다. 엄홍길·박영석·박무택·한왕용·김재수·지현옥·고미영·오은선 등의 원정등반 열기가 20년 이상 앞서있던 일본을 일거에 따돌리며 한국을 등산강국으로 끌어올렸다.

 

그중에서도 엄홍길은 개척자이며 단연 선두주자다. 술집이든 산이든 엄홍길의 인기가 연예인 뺨친다. “엄 대장이닷!” 엄홍길이 나타났다 하면 어느새 사진 찍자는 사람이 줄을 선다. 이럴 때 엄홍길은 노련하다. 그의 건배사이기도 한 “우리는 하나다.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를 외치며 포즈를 잡아준다. 사람들의 양손을 잡고 성스러운 히말라야의 기를 나눠주곤 한다. 그게 엄홍길의 위엄이고 권위다. 히말라야를 다녀왔다고 누구나  ‘국민 등반대장’  호칭을 듣는 건 아니다. ‘영원한 대장’ 엄홍길만이 유일하게 듣고 있는 경배의 호칭이다.

 

언젠가 인사동 유명 음식점의 여주인이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사내들이 소금에 절인 배추마냥 흐물흐물하니까 엄홍길이 더 훤하게 돋보이지. 엄홍길 같이 피가 뜨거운 애들이 많아야 세상이 뜨끈뜨근 살맛날텐데. 많은 여자들이 저 국보급 사내를 한번씩 품어서 확 품종개량 좀 했으면 좋겄다.” 워낙 입 건 여장부가 아무렇게나 던지는 ‘성인용’ 농담이긴 해도 씩씩한 사내, 기개와 호연지기가 씨가 마른 세상을 꼬집는 말로는 따끔했다.

 

하지만 투박하고 거친 역정과 달리 성품이나 언행에서 소박하고 순수한 게 엄홍길의 매력이다. 등산복에 티베트 부적 목걸이, 트레이드 마크인 카우보이 모자를 걸치고 티베트식 합장 인사를 하면 엄홍길만의 폼이 제대로 잡힌다. 엄홍길은 최근 건배 구호를 바꿨다. “기!” 히말라야의 정기를 전해준다는 뜻이란다.

 

엄홍길은 쉰 살을 통과하면서 험난한 고산에서는 내려왔다. 요즘 힘을 쏟고 있는 일은 ‘엄홍길 휴먼재단’이다. “이게 내 인생의 17좌 도전이다.” 재단은 네팔 등 오지에 학교와 의료·복지시설을 지원하고, 사고를 당한 셰르파와 후배 산악인 유족들을 돕는 일을 한다. 히말라야 지역에 16개를 목표로 휴먼스쿨을 짓고 있다. 지난 26일로 8번째 학교가 세워졌다. 그러므로 엄홍길은 ‘희망 전도사’다. “나를 살려준 히말라야의 은혜와 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친구들에 대한 업보를 갚고 있다.” 네팔에서는 그를 ‘바라사부(최고의 스승)’라고 부른다고 한다.

 

엄홍길에게는 강의요청도 쇄도한다. 이미 ‘리더십’ 인기 강사로 알려졌다. 까마득한 난벽(難壁)과 희박한 산소를 이겨내던 처절한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기에 청중들이 매료된다. 고산등반 원정대의 공통된 목표의식, 일사분란한 정상도전, 뜨거운 동료애, 죽음 앞에서 머뭇대지 않고 자일을 끊어내는 자기희생이야말로 난제가 첩첩산중인 한국사회의 해법이기도 할 듯싶다.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실패야말로 인생의 자산이다.”

 

눈 씻고 찾아봐도 목숨 걸 일이 없는 세상이다. 엄홍길의 도전은 그래서 더 빛난다. 히말라야라는 큰 그림을 펼쳐놓고서 온 목숨과 인생을 다 걸고 탐험하고 도전하는 한 사나이! 엄홍길의 좌우명은 ‘자승최강(自勝最强)’이다.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가장 강하다.

 

어느새 또 한 해가 저물어간다. 이런 때 드높은 산을 생각한다. 인생이란 각자 자기 앞의 산을 오르는 일에 다름 아닐 거다. 그렇다. 인생은 자신의 산을 오르는 일. 평탄한 길도 별로 없다. 깔딱고개를 만나 주저 앉고 싶어질 때가 더 많다. 결국 목숨을 거는 듯이 마음을 다잡고 저 까마득한 능선을 타고넘을 때라야 인생의 히말라야 봉우리는 장엄하게 솟아오르는게 아닐까.

 

엄홍길은 말했다. “돌밭을 지나야 꽃밭이 나온다. 어둠을 지나야 찬란한 아침이 온다.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으면 안된다. 꽃밭은 항상 가장 가파른 고개 너머에 있다. 가다가 주저앉으면 그 꽃을 볼 수 없다.” 당신이 있는 곳은 지금 몇 부 능선인가. 김석종 |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