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사제’ 문규현 신부
ㆍ“불안 속에서 희망을, 불편 속에서 평화를 누리겠습니다”
누군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서양에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레프트 형제’가 있다고. ‘투쟁의 현장’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문정현·문규현 신부 이야기다.
지난달 23일 ‘문규현 바오로 신부(66)가 35년간의 본당 사목직에서 은퇴했다. 이날 천주교 전주교구 평화동성당(전주시 완산구 평화동)에서 문 신부의 은퇴미사와 송별식이 열렸다. 평화동성당의 신도들, 문 신부와 인연이 있는 신부·수녀들,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 현장에서 만난 노동자와 농민들, 용산참사 유가족 등이 성당을 가득 메웠다. 형님 문정현 신부도 ‘간달프’ 같은 흰수염을 뽐내며 자리를 지켰다. ‘통일의 꽃’ 임수경씨, 소설가 공선옥씨 모습도 보였다.
“이제부턴 자유로움 속에서 몸과 마음이 머물 자리를 찾고, 홀로 있으면서도 사람들과 친밀하게 교감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상실감이 가져다주는 또 다른 선물을, 내려놓음으로써 지켜지는 것들을, 비우면서 채워짐을 지켜보겠습니다. 불안함 속에서 희망을, 불편함 속에서 평화를 누려보겠습니다.”
성당 안팎에는 ‘석별, 그래도 희망입니다’ ‘사랑해요 문규현 신부님’이라는 글이 적힌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전주 | 김세구 선임기자
본당 신부로서는 마지막으로 집전한 미사에서 ‘이제 떠나야 할 때’라고 인사하는 문 신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여기저기서 낮은 흐느낌과 탄식이 들렸다. 문 신부는 “마지막 본당 이름이 ‘평화’(평화동성당)인 것은 정말로 아주 특별한 선물”이라며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쳤다. 박수가 터져나왔다. 문 신부가 능숙하게 ‘3배’를 올렸을 때 또 한차례 길고 긴 박수가 쏟아졌다.
문 신부는 여기저기 사람들 사이를 돌면서 하나하나 반갑게 껴안고 손을 잡았다. 짧게 깎은 머리, 성글게 자란 수염, 동그란 안경, 자글자글한 얼굴 주름…. 삼보일배와 오체투지로 햇볕에 익고 바람에 그을린 ‘흙색’ 얼굴 가득 번지는 미소가 해맑았다.
원래 이날 행사가 끝난 후 따로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도저히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자리를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 포기했다. 다음은 나중에 e메일과 전화를 통해 보충한 내용이다.
-본당 신부직을 은퇴하는 소회가 어떻습니까.
“본당 사제를 그만둔다고 신부 생활이 끝난 줄로 아는데 그렇지는 않아요. 교회 조직에 얽매이지 않는 ‘원로사목자’로 새출발하는 겁니다. 이제 더 과감하게 나를 던지고, 끌어안고, 더불어 사는 삶을 기대하고 있어요. 말하자면 ‘정의로운 투신’ 같은 거죠.”
-스스로 은퇴를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
“신부도 정년이 있어요. 나는 호적 나이가 늦게 돼 있어서 아직 좀 남아 있지요. 그런데 사실 우리 나이쯤 되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안주하게 돼요. 안주하면 영혼이 금방 탁해집니다. 신자들은 새로운 걸 만나고 싶어하는데 우리는 그런 활력과 생동감을 불어넣기가 쉽지 않아요.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완고한 노인네로 남죠. 살아있는 교회, 움직이는 교회가 되게 하려면, 비켜주고 내어주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려놓길 정말 잘했다 싶어요.”
-홀연히 길 떠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사실 쓰러지기 전에는 전북 부안에 정착해 농사지으며 나머지 인생을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단 몸이 성치 않으니 모든 사람들이 걱정하며 뜯어말립니다. 저도 이런 변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죠.”
-이제 성당을 떠나면 어디서 어떻게 지냅니까.
“전주 시내에 자그마한 아파트를 마련했어요. 책 좀 읽어야죠. 바쁘다고 대충 읽은 책들, 그냥 쌓아둔 책들을 읽겠습니다. 그동안 제 삶에 동반해준 분들이 참 많습니다. 방북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나, 삼보일배, 오체투지…. 돌아보면 제가 어려울 때마다 유형무형으로 참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함께 고난을 겪었던 분들, 기도해주신 분들에게 감사 인사 하면서 지내고 싶습니다.”
-본당 신부직을 떠나 맨처음 무슨 일을 할 건가요.
“형님(문정현 신부), 누나(문현옥 수녀)와 함께 여행을 하기로 했어요. 특히 누나는 제 뒷바라지를 하느라 긴 세월 몸 고생 마음고생이 많았는데 이제 보답해야 할 때입니다.”
-공적인 활동에 대한 계획도 세웠나요.
“삶을 정리해가는 제게 생명과 평화라는 평생의 화두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아직 구체적으론 잘 모르겠습니다. 막연하지만 천주교회 안에서든 밖에서든, 희망에 투신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우는 교육활동을 하는 것이 제 몫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 주위 분들이 저의 본당 은퇴 뒤 사목활동을 생각해서 카페를 만들고 있습니다.”
문 신부가 말하는 카페는 온라인 카페가 아니라 ‘진짜 찻집’이다. 전북대 정문앞 코앞빌딩 2층에 200㎡ 남짓의 공간을 마련해 지금 인테리어 작업 중이다. 카페 이름은 문 신부가 쓴 책의 제목인 ‘그래도 희망입니다’이다. 이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생명·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작정이다. 현재 문 신부가 대표를 맡고 있는 ‘생명평화 마중물’ 회원들의 만남 장소로도 운영된다.
“저더러 심하게 움직이진 말되, 사람들에게 계속 희망을 주라는 명을 내린 거지요. 성당에서 하던 영화 보기도 계속하고, 그냥 한가롭게 노닥거리기도 하고,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기서 만나고, 뭘 하면 좋을지 함께 궁리도 할 겁니다. 젊은 친구들을 일깨우는 교육도 하고요.”
1945년 1월1일생인 문 신부는 자신을 ‘해방둥이’가 아니라 ‘분단둥이’라고 부른다. 1989년 방북했던 임수경양의 손을 잡고 휴전선 북쪽에서 판문점을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1998년에도 평양통일대축전에 참가했다가 또 한번 ‘영어’의 몸이 됐다.
2000년대 들어서도 그는 줄곧 ‘현장’을 지켰다. 그의 삶 자체가 생명평화운동의 뚜렷한 구심이었다. 새만금 간척사업을 막으려고 전북 부안 해창갯벌부터 서울 광화문까지 65일 동안 목숨 걸고 삼보일배를 했다. 현 정부 들어서는 4대강 사업에 반대해 ‘오체투지 순례’를 펼쳤다. 수경 스님, 전종훈 신부와 함께 지리산 하악단에서 파주 임진각 망배단까지 장장 400㎞를 124일 동안 ‘자벌레처럼’ 땅바닥을 기었다.
-삼보일배와 오체투지로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1분 1초라도 빨리 가려는 속도의 시대를 반성하고 성찰했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받들어 모시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우리 안의 탐욕과 이기심을 내려놓으면 세상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언젠가 땀과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아스팔트 위를 힘겹게 기어가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뙤약볕에 말라가는 지렁이에게 그의 땀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러자 죽은듯이 늘어져 있던 지렁이가 금방 생기를 얻어서 앞으로 기어가더란다. 그는 “몸을 낮추고 낮추면 비로소 생명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문 신부는 2009년 용산참사 현장에서 단식투쟁을 하다가 11일 만에 의식불명에 빠졌다. 오체투지를 끝내고 지친 몸을 쉬게 할 틈도 없이 단식에 들어간 것이 탈이었다. 10분간 심장박동이 정지된 상태에서 저체온요법을 통해 가까스로 살아났다. 소생할 확률이 10% 정도밖에 안되는 상태였다고 한다.
-아직도 후유증이 남아 있습니까.
“큰 수술만 두 번 받았어요. 요추가 부러져서 허리 수술을 받았고, 1년 만에 철심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지요. 등에는 수술 흔적이 길게 나 있어요. 심장 쪽에는 한번 더 쓰러지면 119 역할을 해줄 ‘제세동기’를 심었어요. 마른 몸에 기계가 튀어나와 있는 게 보입니다. 얼마 전 목욕탕에 갔는데 등 미는 분이 깜짝 놀라면서 안타까워하더군요. 요즘은 허리가 자꾸 구부정해지고 폭삭 늙었다는 얘기도 들어요. 그저 살아있는 게 기적이고 감사하지요.”
-이제 은퇴했으니 투쟁에 전념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던데요.
“묶인 곳 없이 자유로워진다 싶으니까 그런 말 하겠지요. 이제는 차 타고 긴 시간 이동하는 것도 힘들어요. 활발하게 움직이기 어려운 육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허리가 좋지 않고 나이도 있지요. 다만 전보다는 여유로워졌으니 마음과 시선이 더 넓게, 더 멀리 가도록 할 겁니다.”
-평생 ‘사제란 무엇인가를 묻고 대답했다’고 했습니다. 지금 그 대답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들어주고, 함께 있어 주는 사람입니다. 단 한 사람일지라도 고통받는 사람의 자리에서, 그 사람의 시선으로 하느님을 말하게 하는 사람이지요. 인간뿐 아니라 인간보다 약한 자연의 편에서도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2011년을 맞으며 어떤 기도를 했나요.
“불편, 변화, 홀로 있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무엇보다 딱히 할 일이 없는 막연함과 심심함을 즐길 수 있게 해달라고 했어요. 하하. 이 모든 것들이 축복임을 알고 인생 마무리를 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신부님께 형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동지요, 스승이요, 살아있는 예수님이지요.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을 때 형님이 들어오니까 무의식 상태인데도 내가 일어나려고 몸을 꼼지락거리더래요. 물론 온 몸이 묶여 있으니 못 일어났지만. 간호사가 ‘신부님이 정말 좋아하는 분이 오셨나보다’라고 말했다는 거예요.”
문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 문정현 신부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명동성당 구국 선언문’ 사건으로 감옥에 있었다. 문 신부는 형님에게 말했다. “형님, 힘차게 갑시다. 이제 벗이 생겼고, 동료가 생겼고, 동반자가 생겼습니다. 함께 갑시다.” 그리고 평생 그 약속을 지켰다.
-삼보일배, 오체투지 할 때 수경 스님이 신부님을 ‘형님’이라 부르며 정답게 대화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수경 스님과는 어떻게 가까워졌나요.
“그분은 지리산 선방에서 수행하다가 지리산댐 반대운동 때문에 세상으로 나왔어요.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운동으로 나와 만나게 됐지요. 그후 10여년을 함께 울고, 기도하고, 서로 길을 물어온 형제요, 도반입니다. 새만금 싸움이 너무 힘들 때 내가 물었죠. ‘길이 안 보인다. 어떡해야 할까?’ 스님은 ‘죽으면 되지!’라고 명쾌하게 대답했어요. 그 길이 삼보일배의 길이었고, 오체투지의 길이었습니다. 미운 정 고운 정 다들었지요. 우리 둘 다 꼴통스러운 면이 있지만 내가 섬세할 땐 그이가 투박하고, 그이가 섬세할 땐 내가 내지르기도 하면서 긴 세월 동행했지요.”
-수경 스님은 왜 떠났습니까.
“수행자의 길을 찾으러 떠난 거지요. 문수 스님의 4대강 사업 반대 소신공양에 정말 결정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았어요. 자신은 말과 껍데기로만 살고 있다는 얘기를 자꾸 했어요. 저는 수경 스님이 남아 있는 이들에게 화두를 던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에게 짐을 다 얹어놓고 정작 자기 할 일, 자기의 몫을 망각한 사람들이 이제는 스스로 길을 찾고, 그 길에 서라는 뜻이지요.”
수경 스님은 길 떠나기 전 문 신부에게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형님, 나 괴로워 죽겄어. 아주 힘들어”라며 애끊는 고통을 토해내곤 했다고 한다. 문 신부는 “수경 스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4대강을 살리기 위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며 “강들의 죽음을 막아내는 그 길에서만 수경 스님을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혹시 연락이 온 적은 없나요.
“그런 일 없습니다. 드문드문 소식은 듣죠. 이제 시간 많은 내가 찾아 나설까, 그냥 무언 속에 교감할까 궁리 중입니다. 무엇이 스님 마음에 합당한지를 생각해야 하니까요. 아픈 다리를 절룩이며 삼보일배 오체투지 다 했는데, 그게 가슴 아파요. 스님이 다리를 돌보고 건강을 회복하며 잘 지내고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따뜻한 봄날, 모든 강이 살아 아름답게 흐르는 강가에서 곡차 한 잔 나눠야죠.”
-4대강 사업을 중단시키기에는 이제 영 늦어버린 것 아닌가요.
“공사가 강행되고 있다고 체념하면 안됩니다. 저는 아직 새만금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은 저들이 원하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강을 치명적으로 죽이는 행위입니다. 죽이면 살리겠다고, 보를 세우면 철거하겠다고 달려들어야 합니다. 권력도 돈도 없는 우리에게 무기는 신념과 희망이고, 질기게 악착같이 가려는 정신입니다.”
-구제역으로 전국이 비상입니다. 살처분되는 가축들을 보면서 사제로서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그릇된 삶의 방식으로 자신들을 억압하는 인간들에게 동물들이 복수하는 것 같아요. 가축들만 생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농민, 음식점, 지역사회, 축산 관련업 종사자들, 심지어 소비자들까지도 다 초토화되고 고립되는 겁니다. 다른 생명들을 존중하는 식습관,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사회, 지속가능한 축산 등등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지금 한가할 수가 없습니다.”
문 신부는 이 시대에 들려주고 싶은 성경 말씀으로 마태오복음서의 ‘참 행복’을 꼽았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행복선언’이다.
마지막으로 문 신부에게 현 정부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물었다.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 아예 안 하는 게 좋겠습니다.”
임수경과 방북, 새만금 삼보일배, 오체투지 순례 등으로 유명
문규현 신부는 전북 익산에서 부친 문범문씨(베드로)와 모친 장순례씨(수산나)의 4남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5대째 천주교 집안으로 두 아들은 신부가, 한 명의 딸은 수녀가 됐다.
1976년 5월3일 광주 대건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천주교 전주교구 소속 신부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후 전동, 고산, 팔마, 김제 요촌, 서학동, 부안 성당 등에서 사목을 했다. 87년 미국 메리놀 신학대학원에서 ‘한반도 통일에 대한 신학적 고찰’이라는 논문 주제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89년 8월15일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 학생의 판문점 귀환에 동행했다.
2003년 3월부터 전국 부안 해창갯벌에서 서울까지 ‘온 세상의 생명평화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한 삼보일배’를 했다. 2003년 한국환경기자클럽이 선정한 ‘2003 올해의 환경인상’, 천주교 서울대교구 일산성당 ‘2003년 일산천주교환경상’을 수상했다. 2005년 2월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로 주소를 옮긴 뒤 미군기지 이전 반대운동을 했다. 2008년 9월부터 124일간 ‘평화의 길, 생명의 길, 사람의 길을 찾아나서는 오체투지’ 순례를 이끌었다. 2009년 10월22일 용산참사 해결을 위한 단식투쟁 중 쓰러져 의식불명, 사흘 만에 회복했다. 천주교 전주교구 평화동 주임신부를 마지막으로 본당 사목에서 은퇴했다.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상임대표,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 상임대표, 생명평화연대 상임대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사단법인 생명평화마중물 대표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