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담배따라 세월따라’ 삶의 애환 피워올린 ‘하얀 연기’-담배의 역사, 흡연의 문화사

김석종 2014. 9. 16. 04:07

 

 

 

   ‘담배따라 세월따라’ 삶의 애환 피워올린 ‘하얀 연기

                                               -담배의 역사, 흡연의 문화사

 

 

 

                                                                       

 

   정적들에 둘러싸여 스트레스가 심하고 병약했던 정조는 ‘남쪽에서 온 신령한 풀’인 남령초(南靈草), 즉 담배로 효험을 봤다고 한다. ‘골초’ 정조는 말한다. “불기운으로 막힌 가슴을 뚫었고, 연기의 진액이 폐를 적셔 편히 잘 수 있었다.”

 
 담배 원산지는 남아메리카 중앙부 고원지대라고 한다. 얼굴이 추해서 한번도 사랑을 해보지 못한 인디언 여인이 자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의 모든 남자와 키스하고 싶어요.” 그녀의 무덤에서 풀이 돋아났는데 그것이 담배라는 인디언 전설이다.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일까.  아메리카 인디오들이 피우 담배는 1492년에 스페인의 탐험가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에 전해지면서 급속하게 세계로 퍼져나간 것으로 전해진다. 담배처럼 인간을 속속들이 점령한 것은 신을 빼고는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시작했다가 골초가 되고, ‘오늘부터는 담배를 끊겠다’고 맹세하면서도 어느샌가 초조하게 담배를 찾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근·현대 담배역사는 시대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담배 이름도 그 시대를 반영하는 상징이 주종을 이루었다. 전쟁 후에는 재건과 건설이 강조됐고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는 그에 어울리는 이름이 나왔다. 브랜드 담배 종류로는 막궐련, 필터담배, 각연, 파이프용, 엽궐련이 있다. 막궐련(종이말음담배)으로는 1879년 일본산 ‘히로’가 처음 들어와 해방 전까지 시장을 장악했다. 1897년부터 청나라를 통해 영국담배 ‘칼표’도 유통됐다. 1905년 일본인이 서울에 연초 공장을 세워 ‘이글’(매표 담배)을 생산했다. 민간 담배업자들이 ‘뽀비’ ‘전화표’ ‘금구’ ‘따리아’를 선보이기도 했다.


 조선군정청 전매국이 1945년 내놓은 광복 기념궐련 ‘승리’는 우리 기술로 만든 최초의 담배다. 가격은 3원(얼마 후 5원으로 인상됐다). 당시에는 잎담배 썬 것을 봉지에 넣어 파는 쌈지담배 ‘풍년초’가 훨씬 대중적이었다. 처녀가 좋아하는 총각에게 담배쌈지를 만들어 선물하는 게 유행이었다. 

 

   이어 ‘백두산’ ’공작’ ‘무궁화’ ‘백구’ ‘진달래’ ‘사슴’ ‘계명’ ‘화랑’ 등이 나왔다. 1949년 선보인 최초의 군용담배인 ‘화랑’은 81년말까지 32년간 지속된 국내 최장수 담배다. 6·25를 겪으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라는 가슴아픈 진중가요 ‘전우야 잘자라’와 함께 대한민국 남자들이 대부분 겪었던 병영의 애환과 추억으로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남기고 있다.

 

 


 6·25 전쟁 후에는 양담배가 국가적인 골칫거리였다. 소설가 박완서의 데뷔작 <나목>에는 미군PX에서 흘러나온 담배 럭키스트라이크 등이 남대문시장으로 밀반출되는 얘기가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한 때 전매청 직원들이 다방 등을 돌며 양담배를 직접 단속하기도 했다. 양담배는 우리나라 담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품질이나 외관이 뛰어났기 때문에 과시용으로 많이 피웠다.

 

 


 전후에는 ‘건설’ ‘아리랑’ ‘파랑새’, 1960년대에는 ‘재건’ ‘새나라’ ‘신탄진’ ‘자유종’ ‘상록수’ ‘청자’ 등이, 1970년대에는 ‘새마을’ ‘환희’, ‘한산도’, ‘거북선’, ‘남대문’ 등이 대표적인 담배였다. 애연가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던 1970년 7월 새로나온 ‘새마을’ 담배의 휘호를 직접 쓰기도 했다.

 

   새마을 운동 시절 정부에서 담배생산을 장려해 농촌마을마다 담배농사를 짓고, 담배를 쪄서 말리는 흙벽돌 담배막이 흔했다. 지금은 이런 담배막은 오지에 드물게 남아있어서 사진작가들의 좋은 소재가 되곤 한다. 1970년대 들어 여대생들의 흡연이 찬·반논쟁과 함께 사회문제가 된 것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1980년대에는 ‘솔’ ‘88’ ’도라지’, 1990년대에는 ‘디스’ ‘오마샤리프’ 등 영어표기 상표가 인기였다.

 

 

 


 과거에도 전매청에서 ‘새 담배를 내놓겠다’고 하면 사람들은 벌써 ‘값만 올리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1986년 정부의 전매사업이었던 담배시장이 개방된 뒤 담배 품질은 과거보다 훨씬 좋아졌다. 대신 금연·혐연 운동이 엄청난 속도로 확산됐다. 이제는 항공기와 식당, 술집은 물론 거리와 건물에서도 애연가들의 설자리가 없어졌다. 담배가 기호품에서 마약이나 다름없는 혐오품으로 전락한 것이다.


 하지만 정조의 경우에서 보듯 이땅에 담배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만병통치약’의 대접을 받았다. 우리나라에 담배는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때에 유럽에서 일본을 거쳐 처음 들어왔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청나를 내왕하던 상인들에 의하여 도입되기도 했다. 남쪽에서 온 것을 남초·왜초·남령초, 중국에서 전해진 것을 서초라고 했다. 담바고(淡婆古), 망우초(忘憂草), 상사초(相思草)로도 불렸다. 흡연도구인 담뱃대는 서양의 파이프가 변형된 것이다(포루투칼·네덜란드·북아메리카는 파이프, 스페인은 여송연이 유행했다).

 

 담배는 진통제나 지혈제 등으로 알려지면서 급속하게 퍼져나가 남녀 구별 없이 피웠다. 풍속화 또는 민화에서도 담배 피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청등화로 백탄숯을 이글이글에 피워 놓고/소상반죽 부산죽에 담배 한대를 붙여 무니/목구녕 안에 실안개 돈다/또 한대를 피우고 나니 청룡황룡이 꿈틀어진듯….” ‘담방구(담배)타령’의 한 대목이다.


 담뱃대는 신분이 낮은 사람은 곰방대를, 신분이 높고 나이가 많은 이는 장죽을 썼다. 양반들은 담뱃대 사치가 심했다. 설대는 소상반죽·부산죽·서산죽을, 대통은 백동을 명품으로 쳤다. 당시 담배는 물론이고 담배쌈지나 장인들이 만든 담뱃대 ‘소상반죽 백동대’가 좋은 좋은 선물이 되었다. 담뱃대 길이도 점차 늘어나 사대부들은 긴 담뱃대에 불을 붙이는 연동(煙童)을 데리고 다녔다. 양가댁 마님들은 항상 담배 전담 여종 연비(煙婢)를 뒤따르게 했다.


 인조반정의 공신인 장유는 기록에 나타난 조선 최초의 골초다. 장인 김상용이 ‘요초(妖草)’에 홀린 사위를 구해달라고 상소를 할 정도였다. 장유가 처음 ‘담배(痰排)’라는 이름을 썼다. 담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정조 때 문신 이옥은 담배의 모든 것을 담은 <연경>을 썼다. 다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다.

 

 
 조선시대 장유의 장인 김상용처럼 서양에서도 담배가 보급된 초창기부터 금연을 비판하는 사례가 많았다. 영국의 제임스 1세는 지독한 혐연가였다. “거기서 내뿜어지는 검고 악취나는 연기는 밑바닥 모르게 깊은 갱 속에서 분출하는 지옥의 연기와 매우 비슷하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금연 구역을 지정하는 법안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영국 최초의 흡연자로 군인이자 탐험가였던 월터 롤리는 제임스 1세에게 참수형을 당했단다.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4세는 무려 3만 명의 목을 잘라 악명을 떨쳤다. 기독교 칼뱅주의의 금욕사상이 나온 17세기 독일에서도 공공장소에서 흡연을 하면 법정에 서고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루이 14세, 나폴레옹, 히틀러 등도 담배를 매우 싫어했다.

 

 반면 피카소와 헤밍웨이는 시가를 물고 산 애연가로 유명하다. 처칠, 루스벨트, 맥아더, 린위탕(林語堂), 마크 트웨인, 비스마르크,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등은 수많은 애연의 일화를 남겼다. 마크 트웨인은 “담배를 끊는다는 것은 내가 겪은 일 중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나는 그것을 천 번이나 끊었다”고 했다. 한때 찌푸린 얼굴에 담배를 문 험프리 보가트는 세계적으로 남성미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 왕들 가운데는 고종, 순종이 애연가로 알려져 있다. 명성황후도 궐련을 즐겨 피웠다고 한다. 문인 중에서는 하루에 담배를 10갑 이상 피웠다는 공초(空超) 오상순과 변영로, 김동인이 유명하다. ‘꽁초’로 불렸던 오상순은 “내가 싫어하는 글자로는 금연이라는 두 자다. 이 두 자를 볼 때는 무슨 송충이나 독사를 보는 것같이 소름이 끼친다”고 했다. 조병화는 파이프 담배를 멋쟁이로도 널리 알려졌다.

 


 이번에는 정부가 흡연자의 건강을 위해 담뱃값을 2000원이나 인상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국민건강은 구실이고 애연가의 쌈짓돈을 빼내 부족한 세수를 메우겠다는 것이 본심인 것 같아 씁쓸하다. 담배행정 불신의 역사가 재현되는 모양새다. 35년 동안 하루 최고 8갑까지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는 소설가 이외수는 자신의 트위터에 “국민건강을 위해 담뱃값 올린다는 주장은 용왕님 토끼 간 씹다 어금니 부러지는 소리”라고 썼다. 서민들은 이제 시름을 달랠 담배연기마저 시원하게 뿜어낼 길이 막혀가고 있으니 그게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