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보

‘걸어다니는 영화 백과사전’ 영화연구가 정종화

김석종 2014. 7. 30. 23:30

[김석종의 만인보]‘걸어다니는 영화 백과사전’ 영화연구가 정종화

 

영화배우 안성기가 출연한 영화는 모두 몇 편일까. 답은 135편. 아역으로 출연한 영화가 70편, 얼마 전 개봉한 <신의 한 수>까지 성인역으로 85편에 출연했다. 목소리만 나온 <마리 이야기>는 뺀 숫자다.

이런 ‘부스러기’ 영화지식에서도 영화연구가 정종화(72)는 독보적이다. 정종화는 이렇게 말한다. “중학교 때 이후 국내에서 개봉된 영화 90% 이상을 봤을 거다. 개봉 첫날, 첫 상영 시간에는 늘 영화관에 있었다.” 더 대단한 건 비상한 기억력이다. 국내에서 상영된 외국영화와 한국영화 제목만 대면 메모 한 장 보지 않고도 제작연도, 감독, 배우, 줄거리, 촬영 에피소드를 훤히 꿴다. 영화가 개봉한 날짜와 극장, 입장객 숫자까지 줄줄 쏟아낸다.

이런 식이다. 한국 영화는 1919년 <의리적구투>를 시작으로 지난해 말까지 6500편이 제작됐다. 가장 긴 영화제목은 1974년 신성일·우연정이 출연한 <눈으로 묻고 얼굴로 대답하고 마음속 가득히 사랑은 영원히>다. 1954년 <운명의 손>에서 이향·윤인자가 최초의 키스 장면을 찍었다. 1957년 개봉한 <천지유정>은 국내 최초로 해외(홍콩)에서 촬영했다. 최초의 스포츠 소재 한국영화는 1959년 나온 권투영화 <피묻은 대결>이다. 국내 최다 연출 감독은 김수용으로 110편을 찍었단다. 임권택 감독은 102편으로 2등이다.

 

오드리 헵번이 출연한 우리나라 개봉영화는 <로마의 휴일> <사브리나> <파리의 연인> <전쟁과 평화> 등 12편이다. 마릴린 먼로가 출연한 영화는 1955년 <나이아가라> <돌아오지 않는 강>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가 한꺼번에 개봉된 것을 시작으로 모두 10편이 상영됐다. 그중 <뜨거운 것이 좋아>는 아카데미극장에서 당시로는 엄청난 6만5000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때 극장표가 330환이었단다.

 

그게 다가 아니다. 서부영화 <하이 눈>에서 결투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장치로 시계가 23번 나온다. <제3의 사나이>의 마지막 장면에서 떨어지는 낙엽은 124장이다. 이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화제로 삼아서 상대의 기를 확 꺾어버린다(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다 나온다고 말하는 건 대단한 실례다. 그 원천 자료가 거의 다 정종화에게서 나왔다).

그러니 ‘걸어다니는 영화 백과사전’ ‘영화에 미친 남자’(그가 낸 책 제목이기도 하다)라는 말을 듣는 게 당연하다. 아주 오랜만에 그 정종화를 충무로에서 만났다. “형님. 우리가 못 본 게 한 30년 됐나요?” “25년 됐지. 1989년 1월3일 오후 2시30분 일산 향동,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그럴 줄 알았다. 남의 생일, 결혼기념일까지 머릿속에 집어넣고 사는 사람이니까.

이런 일이 있었다. 영화광을 자처하는 소설가 안정효가 1992년 장편소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썼다. 그러자 ‘한 수 위’의 정종화가 그 책에서 스물네 군데 ‘옥에 티’를 찾아내 편지를 보냈다. 이 소설을 정지영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정종화, 안정효, 정지영 세 사람에다 또 다른 당대의 영화광들이 의기투합해 ‘영광회(映狂會)’를 만들었다. 술과 영화와 인생의 파란만장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고수’들의 불꽃 튀는 입담 대결은 영화계 전설로 남았다(이 얘기는 <만인보> 정지영 감독편에도 썼다).

하여튼 정종화가 살아온 이력을 보면 <헐리우드 키드…> 혹은 <시네마 천국> 영화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 같다. 한국전쟁이 막 끝난 피란 도시 부산. 초등학교 5학년 때 존 웨인이 나오는 서부영화 <역마차>를 보고 황홀한 영화세계에 빠져들었다. 서울 마포에 살 때는 집 근처 경보극장을 제집인 양 드나들었다. 고교 시절에는 극장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물상과 쌀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서라벌예대를 졸업한 뒤 충무로에서 영화사 7곳, 극장 3곳, 영화잡지사 4곳을 옮겨다녔다. 충무로는 한국영화의 메카이자 ‘별들의 고향’이었다. 스카라극장, 대한극장, 명보극장, 중앙극장 같은 개봉관이 있었다. 한때는 영화사가 100개도 넘었다. 날마다 제작자, 감독, 작가, 배우, 촬영 스태프, 그리고 배우 지망생들이 스타다방, 청맥다방, 커피커피, 폭포수다방, 모나미다방에 진을 쳤다(이제 극장은 복합상영관으로 바뀌었고, 영화산업의 중심은 강남으로 옮겨갔다).

 

정종화는 여직 충무로 바닥을 지키고 있다. 이번에 정종화를 만난 곳은 대한극장 옆 지하에 있는 나나커피숍. 그나마 충무로 영화시대의 분위기가 남아있는 곳이다. 충무로 전성시대 '영화계 마당발' 정종화를 쫓아다니며 영화 이야기를 재미있게, 혹은 지겹게 들은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자 또 정종화의 사설이 따라나온다. 대한극장 개관 프로는 1958년 4월18일 케리 그란트·데보라 카 주연의 <잊지 못할 사랑>. 1935년 약초극장, 1946년 수도극장이었다가 1962년 이름을 바꾼 스카라극장은 2005년 사라졌다. 정부에서 문화재로 지정하려고 하자 극장주가 땅값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미리 허물어버렸다(그러니 '문화야만국가'라고 그가 말했다).

정종화는 지난 60년 동안 영화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수집했다. 그렇게 모은 포스터, 팸플릿, 입장권, 스틸사진 등 영화자료가 수만점이다. 영화 포스터는 1만장이 넘는다. 1960년대 소중한 영화필름이 밀짚모자의 장식테로 팔려나가 영영 사라진 마당에 그가 모은 자료들은 참 특별하고 소중하다.

처음에는 “보고 난 영화를 두고두고 알차게 되새기기 위해서” 자료 수집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늘 혼자서 영화를 본다. 종영 자막이 다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은 영화에 대한 예의다. 영화 내용을 삼색 볼펜의 색깔을 바꿔가며 수첩에 기록한다. 그 영화와 관련된 시시콜콜한 자료까지 빠짐없이 모으는 게 영화관람의 마지막 순서다.

자신이 소장한 영화포스터로 지금까지 전시회를 100회 넘게 열었다. 시대극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영화 포스터는 대부분 그의 소장품이다. 신상옥기념관, 신영영화박물관 등은 그의 자료 제공이 있어서 가능했다. 오는 8월 강릉에 문을 여는 절친한 후배 안성기 영화박물관에도 흔쾌히 자료를 보내줬다고 한다. <한국의 영화포스터1·2권> <자료로 본 한국영화사1·2권> <영화동네 사람들> 등 15권의 책도 냈다. 남은 꿈은 그동안 모은 자료들로 ‘정종화 영화자료관’을 건립하는 것.

정종화는 칠순 넘은 나이에도 하나도 안 변했다. 여전히 말은 속사포고 영화이야기는 ‘네버 엔딩’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정종화는 채플린의 이 명언을 자주 패러디한다. “사람은 멀리서 보면 신사, 가까이서 보면 양아치다.” “부부는 멀리서 보면 평화, 가까이서 보면 전쟁이다.”

“남보다 한 시간 먼저”는 그의 생활신조다. 그러니 약속 시간에 늦어본 적 없다. 여태 할리우드에 가보지 못했다. 그래도 할리우드 소식을 속속들이 안다.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 풍속까지 훤하다. 영어도 수준급이다. 모두가 영화 덕이다. “영화를 알면 사랑을 안다. 영화를 알면 인생을 안다.” 정종화가 인생을 다 바쳐 도달한 ‘영화 오디세이’다.


김석종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